브레이크 없는 광기의 가속도, 연극 "날 보러와요"
브레이크 없는 광기의 가속도, 연극 "날 보러와요"
  • 스타포커스
  • 승인 2016.12.06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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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poster_final공연이 끝나면 관객들은 '날 보러와요'가 얼마나 발칙한 제목인지 실감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분노를 느낄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은 경악할 수도 있다. 그 감정들을 꿰뚫는 분명한 메시지는 '반드시 놈을 잡아야 한다'라는 것. 혹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된다'는 무언의 동의.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 원작으로 유명한 연극 '날 보러와요'가 초연 20주년을 맞아 새로운 모습으로 관객과 만나고 있다. 매 회마다 화제의 중심에서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온 만큼 이미 대중성과 작품성은 증명되었다. 그런데 이번 공연은 더 놀라운 모습으로 무대공연의 제약에서 벗어나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날 보러와요'를 관람한 많은 사람들은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원작에 비해 더 생생하다고 말한다. 영화는 사건 위주로 전개되었지만 연극은 인물들의 심리를 더 비중 있게 다룬다. 이번 공연의 가장 큰 특징은 용의자를 배우 한 사람이 연기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는 용의자를 각각 다른 배우들이 연기하며 과연 진짜 범인이 누구인지를 추적했다. 그 과정 자체가 관객의 심장을 졸깃하게 만들며 팽팽한 스릴감을 형성했다.

이번 20주년 공연에는 배우 이규형이 이 캐릭터를 모두 맡았다. 1인 3역을 탁월하게 소화한, 문자 그대로 '무대광풍'이었다. 극에는 모두 3명의 용의자들이 등장한다. 첫 번째 인물은 병적으로 심각한 관음증을 앓고 있는 이영철.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향숙이' 운운하다가 형사들에게 엄청 맞았던 백광호(박노식 분)를 생각하시면 되겠다. 다음 인물은 술김에 살인을 했다며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남현태. 술을 마셔서 잘 기억이 안 난다며 증언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며 보는 이들의 애간장을 태우는 역할이다. 마지막 용의자는 사건 당일에 울려 퍼지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신청한 정인규. 이들이 차례로 나타날 때마다 무대는 난장(亂場)으로 치닫는다. 그 감정을 요약하자면 '혼란스러움, 황당함, 분노' 정도 되겠다.

%ec%ba%a1%ec%b2%98 연극 '날 보러와요' 20주년 공연에 출연하는 배우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사진제공=프로스맵>

정인규의 등장에 이르러서 살인자를 ‘잡으려는 자’와 이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자'의 대립은 극에 달한다. 무대의 온도가 가장 뜨거운 지점에서 누구보다 냉정한 정인규를 연기하는 이규형의 모습은 그 자체로 압도적이다. 특히 정인규를 범인으로 몰아세우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던 형사들이 DNA 검사 결과를 보고 허탈감에 주저앉을 때. 만감의 교차하던 그들의 표정과는 대조적으로 무표정하게 취조실에 앉아 있던 이영철의 모습은 소름이 끼친다. 모든 조명이 암전되고 이영철에게만 탑 라이트가 집중된 순간 씨익 올라가는 입꼬리.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 창백한 얼굴. 최소한의 액팅으로 최대한의 극적 효과를 연출하는 이영철의 연기는 '빙의(憑依)' 그 자체였다. 공연이 끝나고 인사를 할 때에도 그는 여전히 이영철로 보였다. '범인은 저 사람이 아닐까'라는 의구심만 증폭시킨 채.

subposter_final'날 보러와요'의 용의자는 모놀로그가 허용된 배역이 아니다. 그렇다고 다른 인물들과 소통하는 장면도 없다. 그저 자신에게 가해지는 의혹을 받아친다. 어떻게 보면 이 연극에서 가장 외롭고 혹독한 역할이다. 그런데 이 용의자를 각기 다른 모습으로 세 차례씩 소화했다는 것은 이영철의 엄청난 내공을 보여주는 지점이다. 변화무쌍한 그의 연기를 만끽한 뒤 '날 보러와요'라는 제목을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이 연극은 관객들에게 상당한 내상을 남길 것이다. 보는 이들의 숨통을 조이며 2시간 가까운 시간을 찰나처럼 느끼게 했던 이영철의 연기력에 가장 잘 어울리는 찬사는 무대에 흐르던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아니었을까. 모차르트에게 자신의 죽임이 임박했음을 알렸던 '라크리모사'. 그에게 곡을 의뢰했던 검은 가면을 쓴 남자처럼 '날 보러와요'의 살인자 또한 미지의 존재로 남아 있다. 이렇게 멋진 배우들이 무대를 채우고 있는 한 '날 보러와요'의 열풍은 여전히 계속될 듯 하다.

고경태 kkt134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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