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공간이 낯설어지는 영화 "최악의 하루"
익숙한 공간이 낯설어지는 영화 "최악의 하루"
  • 스타포커스
  • 승인 2016.09.01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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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CGV아트하우스>

영화관 안에서 선선하게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첫 문장을 보자마자 누군가 물을 것이다. '4D 영화관인가.' 그렇진 않다. 이제부터 그 바람의 근원을 얘기하겠다. 영화가 시작하는 순간 화면에 꽉 찬 서촌의 풍경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신선한 바람이 나뭇결을 쓰다듬고 초록 잔디를 스쳐간다. 주인공 은희(한예리 분)가 하루 동안 머무는 공간을 산책하듯 지나가는 카메라에, 보는 이 또한 함께하는 기분이다. 영화가 끝나고 잔상이 남는다. 청량감이 넘치는 바람 부는 어느 날, 은희에겐 고단한 하루였지만 보는 이에겐 의미 있는 날이 되었다.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빵 터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웃음에 인색한 남자들조차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크게 웃기 시작했다. 오늘 처음 만난 남자 료헤이(이와세 료 분)의 어이없는 출판 기념회 때문에 한 번 웃고, 은희가 지금 만나는 남자, 현오(권율 분)의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에 두 번 웃는다. 은희가 전에 만났던 이혼남(현재는 유부남이지만), 운철(이희준 분)의 능청스러운 행동에 세 번까지 웃게 한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모두 하루 만에 은희에게 벌어진 일이다. 유쾌한 영화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기에 웃음이 터질 때마다 더욱 영화에 집중했다. 마냥 웃다가 어느 순간, 씁쓸한 감정을 느낀다. 찰리 채플린의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는 말처럼 은희가 처한 이 지독한 하루가 외롭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귀여우면 다야? 너 남자한테도 그렇게 웃니?"라고 은희에게 선배가 말했다. 은희는 과장된 귀여운 행동이나, 말투가 아닌 외모에서 풍기는 묘한 매력을 지녔다. 그래서 그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마냥 밉게만 보이진 않는다. 세 남자와의 관계 속에서 그녀는 그 어느 순간도 거짓 없이 그들을 대한다. 영화에서 자주 강조하는 진짜와 가짜의 차이를 그녀의 행동에서 찾지는 말자. 그녀의 행동이 의심된다면 영화의 대사에 집중해보자. 그녀가 자주 중얼거리는 독백 대사처럼 단지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조차 연극을 하는 것뿐이다.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닌, 그녀는 그저 결핍된 욕망을 채우고자 했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망치려고 작정한 하루'가 아니라 어쩌면 그녀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벌여놓은 일들이 한꺼번에 터져버린 것일지도. 은희가 자처한 일이지만 감독은 그녀에게 죄를 묻진 않는다. 다른 이들도 한 번쯤은 겪는 기나긴 하루를 그저 지켜만 본다.

"할 때는 진짜, 끝나면 가짜"라고 은희가 료헤이에게 말했던 것처럼, 마치 연극의 주인공이 바뀌듯 은희는 다른 남자들과 함께 있을 때마다 그때그때 변한다. 무심결에 다른 여자 이름을 부른 현 남친 현오와 있다가 헤어지고 혼자 남게 되자, 은희는 갑자기 머리를 묶는다. 머리를 묶자마자 나타나는 또 다른 남자 운철. 그녀는 머리를 묶었다 풀 때마다 다른 사람을 연기하는 것처럼 그 순간의 감정에 충실했다. 마치 조금 전의 현오와 있었던 일은 다 잊어버린 여자처럼 운철과의 사랑에 가슴 아파한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그녀가 그들을 진정 사랑하고 있는 모습을 느끼진 못했다. 순간순간 변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할 뿐이지 진짜 은희가 사랑하는 이는 없다. 현오는 그녀를 거짓말을 잘하는 여자라 정의하고, 운철은 그녀의 감정엔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의 감정만 그녀에게 강요한다. 오히려 처음 만난 료헤이에게 가장 자신을 많이 보여주는 은희. 은희가 료헤이에게 영어로는 거짓말을 하기 힘들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렇다는 말은 오늘 처음 만난 낯선 일본인에겐 그녀가 가장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료헤이가 약속 장소로 찾아 헤맨 류가헌. 실제 갤러리로 운영되고 있는 류가헌이 영화의 도입부에서 유독 강조된다. 그러나 막상 료헤이가 그토록 찾던 류가헌은 영화 속에서 그리 중요한 공간이 아니다. 왜 도입부에 류가헌이라는 갤러리에 집중하게 하였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서촌의 풍경과 길을 잃은 료헤이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되긴 하지만 장소에 대한 궁금증만 증가시켜 놓고 해결해주지 않아 아쉽다. 영화를 본 관객에게 류가헌이라는 장소를 끝까지 궁금하게 만들려는 의도였다면 모를까. 류가헌의 정체는 허탈하다.

아줌마 단둘만 구경하러 온 출판기념회가 끝나고 등장한 여기자의 존재가 모호하다. 현실에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묘한 분위기를 풍기더니 작품에 관한 질문을 하다 돌연 사라지고 텅 빈 자리에 료헤이만 남아 있다. 마치 그 전부터 그 혼자 있었던 것처럼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장면이었다. 붉은 립스틱을 바른 여기자. 강렬한 인상을 주고 사라진 묘령의 여기자는 과연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남기고 떠났을까. 료헤이의 자신의 책을 설명하는 장면에서 감독은 영화 속에서 표현하고 싶은 메시지를 강렬하게 어필한다. 료헤이와 동일시되는 감독이, 그리고 싶은 세계를 친절하게 설명해준다고나 할까. 김종관 감독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명장면이다.

영화보다는 한 편의 연극처럼 느껴진 '최악의 하루'는 은희를 심란하게 만드는 장치들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독립영화가 가지는 미학과 동시에 작품성 또한 뛰어났다. 단순히 힘들었던 어느 하루를 그린 것이 아닌 주인공의 깊은 마음속 외로움을 들춰낸 작품이었다. 어두운 남산에 올라 한없이 서울 야경을 바라보던 은희의 뒷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김서해 free70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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