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에 표정을 담는 그녀 캘리그라퍼 전은선 작가
글씨에 표정을 담는 그녀 캘리그라퍼 전은선 작가
  • 스타포커스
  • 승인 2018.08.29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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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후예>, <나의 아저씨>, <이리와 안아줘> 등 국내 유수의 드라마 타이틀 작업을 도맡아온 전은선 작가. 캘리그라피의 매력을 전파한 일등공신이기도 한 그를 지난 6월, 경기도 용인의 한 작업실에서 만났다. 까다로운 방송계에서 실력으로 입지를 다지기까지  전은선 작가의 작업 스토리에는 남다른 감각, 숨은 노력이 깃들어 있었다. 

Editor 박주연 ㅣ Photographer 박용진

1천 번의 도전, 우리는 몰랐던 드라마 타이틀의 비밀 

‘아름다운 서체’라는 그리스어로부터 유래된 캘리그라피(Calligraphy). 획일화된 폰트와는 달리, 손맛을 담아낸 글자엔 저마다의 표정과 분위기가 깃들어있다. 방송·광고 등 다방면에서 캘리그라피의 쓰임이 다양해지는 이유다. 하지만 그냥 적당히 흘려 쓰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은 큰 오산이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캘리그라피의 편견 중 하나기도 하다.

전은선 작가는 한 개의 드라마 타이틀을 위해 무려 1천 번 이상 글씨를 쓴다고 한다. 노력만이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낸다는 그녀의 작업 지론 때문이다. 지칠 법도 했지만 이 일이 좋고 즐겁기에 몇 번이든 기꺼이 쓸 수 있다고. 시안마다, 작품마다 최대한 다른 느낌으로 작업물을 도출해내려는 노력 끝에 겨우 세상 밖으로 나오는 글씨. 짧은 타이틀 작업 하나에도 이토록 많은 정성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Q. 인기 드라마의 타이틀을 많이 쓰셨는데 주로 어떤 방식으로 작업이 이뤄지나요? 

의뢰받은 작품의 시놉시스와 4부 가량의 대본을 먼저 받아요. 그걸 읽으면서 드라마에 대해 상상을 하죠. 더러는 ‘경쾌하게’ ‘밝게’ 등 구체적으로 주문을 주는 경우도 있어요. 그걸 제 느낌과 조합해서 써요. 물론 처음엔 막막해요. 글자를 어떻게 모을까, 이 음절을 어떻게 하나로 붙일까. 간격, 높이, 크기, 굵기, 공간을 모두 생각한 다음에야 한 번 써보는 거죠. 일주일에서 열흘 가량 작업 기간을 갖고 제일 괜찮은 몇 가지 시안을 결정해요. 한 사람인지라,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여러 개 시안을 뽑는 게 어렵더라고요. 그래도 최대한 다르게 쓰려고 노력하죠. 이후 연출부의 의견에 따라 바로 통과되기도 하고 추가 수정을 거치기도 해요.

Q. 내 의견과 제작진의 의견을 취합하고 계속 수정하는 작업이 만만치 않겠네요. 

쓰고 난 뒤에 수정하는 과정이 더 중요해요. 내 눈에 잘 보이는 곳에 걸어놓고 계속 고치기도 하고요. 신선한 눈으로 봐야 할 필요성도 있기에 휴대전화에 넣어놓고 문득 한 번 보고 고치기도 하죠. 그 과정들이 불안하고 답답하긴 해요. 처음 의뢰를 받을 땐 아이디어와 에너지가 넘쳐서 ‘쉽게 하겠는데?’ 하다가도 본 작업에 들어가면 여지없이 무너지거든요. 일정 기간 괴로움을 버텨야 결과물이 나온다는 걸 이제는 받아들이려고 하죠. 비록 괴로워도 진심을 담아서 써야겠다는 마음만큼은 잊지 않으려 해요. 내 선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게 드라마에 잘 쓰였으면 좋겠거든요. 연출부에서 몇 번의 수정 요청이 들어와도 전 그게 수고스럽지 않아요. 드라마 타이틀이라는 건 순수 작업이 아니라 대상이 분명한 상업 캘리그라피이기도 하잖아요.

작업실 벽면에 장식된 드라마 타이틀 작업물과 즉석에서 작업 중인 전은선 작가. 즉흥적인 부탁에도 그녀는 즐겁고 또 진지하게 작업에 임했다.

울고 웃고, 글자에 표정을 심다

인고의 시간을 견뎌 완성된 전은선 작가의 작업물은 저마다의 생명력을 지닌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와 이미지가 있는가하면 어떤 글자엔 선명한 표정이 담겨있다. <상어>에서는 날카로운 지느러미의 느낌이 표현됐고 <그겨울, 바람이 분다>는 글자가 서늘한 바람에 날리는 듯 보인다. 고등학생들의 치어리딩을 그린 <발칙하게 고고>는 양 손에 응원 수술을 들고 있는 치어리더의 모습을 ‘ㅊ(치읓)’ 글자로 형상화해 재기발랄함을 더했다. 무한한 표현이 가능한 손글씨만의 매력이기도 하다.

Q. 어떤 도구로,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결과물이 천차만별이겠네요.

저는 글씨에 의미를 담고자 하는 스타일이에요. 예를 들어 <가면>처럼 날카로운 복수극일 경우 선의 끝처리를 날카롭게 뽑아요. 획 중에 ‘ㄴ(니은)’은 속을 알 수 없는 입꼬리처럼 보이게 썼죠. <블러드>의 경우 뱀파이어인 외과의사 히어로 스토리잖아요. ‘ㅂ(비읍)’을 잘 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히어로 ‘베트맨’의 가면 느낌이 나기도 해요. 글씨를 쓰다 보면 이미지들이 눈앞에 튀어나올 때가 있거든요. 많이 쓰다보면 새로운 게 보이더라고요. 한글인데도 가끔 ‘사람 같네?’ 할 때도 있고요. 신기하죠. 매번 한글의 대단함을 느껴요.

Q. 모든 작품이 소중하겠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작업이 있나요.   

맞아요. 쓰고 나면 전부 내 자식같은 애틋함이 있어요. 그 중에서도 <상어>가 좀 특별해요. 이 작품으로 지금까지 온 게 아닐까 생각하거든요. <상어> 이후로 작업 의뢰 요청을 많이 받았어요. 글씨를 쓰는 친구들과 디자인 종사자들에게도 칭찬을 많이 받아서 스스로에게도 전환점이 된 작품이었죠. 첫 방송 오프닝 타이틀에서 물 위의 장면에 ‘상어’ 두 글자를 띄워주셨는데 정말 상어 같더라고요.(웃음) 제작진 분들이 잘 써주시고 특별히 예뻐해 주셔서 감사했죠. 최근엔 tvN <나의 아저씨>의 김원석 감독님도 제 글씨를 참 좋아해주셨는데 덕분에 제가 타이틀뿐만 아니라 배우, 스태프들 이름과 방송 회차까지 다 쓰게 됐어요. 그럴 땐 엄청 뿌듯해요.

Q. tvN <빠스껫 볼>은 기존 작업물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 들어요. 

원래 제가 쓰던 스타일이 아니라서 <빠스껫 볼> 쓰면서는 공부를 많이 했어요. 1940년대 얘기라 오래된 벽화 같은 느낌을 주문 받았거든요. ‘빠’ 글자 하나를 A3 정도 크기로 현판 쓰듯이 크게 썼어요. ‘ㅅ(시옷)’과 ‘ㄱ(기역)’을 합친 합용병서를 타이틀로 사용했는데 그게 원래는 1933년도에 폐지가 됐다고 하더라고요. 국립국어원에 전화해서 배경이 1940년대인데 사용 가능한지도 직접 확인했고요.(웃음) 보통 시안을 여러 개 뽑은 후 고르는 형식이었다면, <빠스껫 볼>은 시안 하나를 두고 계속 수정해 나가는 케이스였어요.

“내 글씨를 알리자!”… 캘리그라퍼를 꿈꾸는 이들에게

패션 디자인을 전공하고 패션업계에서 일했던 전은선 작가는 휴식 기간에 우연한 계기로 캘리그라피를 알게 된 후 완전히 매료됐다. 당시 캘리그라피는 잘 알려진 분야가 아니었던 터라, ‘글씨를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라는 생각 자체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마음을 뺏긴 이후로는 누구보다 열심히 이 분야를 연구했다. 더 좋은 글씨를 쓰기 위해, 드라마 타이틀 작업에 다양하게 활용하기 위해 지금까지도 전통서예, 문인화 등을 꾸준히 배운다. 계속 익히고 쓰는 습관만이 좋은 글씨를 쓸 수 있는 정직한 방법이라고 전은선 작가는 말한다.

Q. 몇 년 새에 캘리그라피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졌는데, 우려도 있으시다고요? 

너무 좋은 현상이지만 걱정은 돼요. 제가 서예를 배우는 것도 조형이 자기 멋대로 흐르거나 글씨가 흐물거리는 걸 방지하려는 의도가 있었어요. 글씨 안에 뼈가 있고 그걸 둘러싼 살, 근육이 있고 흐르는 피가 있다고들 하거든요. 그냥 내려 긋는 한 획에도 이 네 가지가 포함돼 있어야 좋은 획이라고 하죠. 그런데 종종 가독이 떨어지거나 멋을 내려고 흘려 쓰는 글씨들을 보면 아쉬워요. 그런 글씨를 좋은 글씨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잖아요. 물론 제가 잘 쓴다고 할 수는 없어요. 글씨라는 건 개인적인 감상이니까요. 그럼에도 바람이 있다면 글씨를 잘 쓰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의뢰가 가고, 그 사람들의 글씨가 ‘좋은 글씨’로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Q. 캘리그라퍼를 꿈꾸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말씀을 해주신다면요? 

우선 내가 좋고 나아가서는 내가 쓴 걸 보고 남이 좋아하는 글씨를 써보자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현대에서는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도구가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시작

전은선 작가가 직접 그린 문인화. 전 작가는 주기적으로 전통서예와 문인화를 배운다. 또 다른 벽면에는 각종 사이즈의 붓이 정갈하게 전시돼 있다.

은 마음을 전하는 거예요. 그 사람이 좋아해주면 그게 또 제 행복일 수 있잖아요. 혼자 쓰고 자기만족으로 좋아하는 건 한계가 있어요. 취미에 한계가 있는 것처럼요. 글씨가 필요한 곳이 주변에 반드시 있어요. 내 글씨를 알리고 쓰이도록 일을 성사하는 것도 방법이에요. 혼자 쓰던 내 글씨가 어딘가에 활용되거나, 누군가에게 기쁨을 준다면 더 오래 이 일을 할 수 있을 거예요. 또 한 가지. 글씨는 오래 써야 늘고 완성이랄 것도 없어요. ‘소년 문장가는 있어도 소년 서예가는 없다’는 말처럼, 태초부터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없다는 거죠. 누구든 오랜 시간을 쏟아야만 잘 쓸 수 있어요. 원래가 그런 거니까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하고, 또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행복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Q. 몇 년 간 바쁘게 달려오셨잖아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작업물을 대하는 첫 느낌은 항상 똑같아요. 늘 힘들죠. 하지만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여유가 조금 생겼다는 거예요. 작업을 안 하더라도 마음이 조급해서 사람들도 못 만났던 때가 있었거든요. 지금은 오히려 사람들을 만나서 머릿속을 환기시키고, 내 눈이 다시 신선해져 오면 글씨가 잘 써지더라고요. 그래서 예전부터 계획했던 일들을 하나씩 해볼까 해요. 커리큘럼을 짜서 소규모로 강의를 해보고 싶어요. 강의뿐만 아니라 저와 수강생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거든요. 전시를 해보고, 또 책을 한 번 써봐야겠다 하는 계획도 있어요. 다행이도 지금 에너지가 분출되는 시기라 의욕이 샘솟는데, 올해 안에 3개 중 하나는 할 수 있겠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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