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에서 피어오르던 시간의 의미, 영화 "커피 메이트"
찻잔에서 피어오르던 시간의 의미, 영화 "커피 메이트"
  • 스타포커스
  • 승인 2017.03.07 10: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진제공=(주)스톰픽쳐스코리아>

가끔 카페에 혼자 앉아 있으면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한 채 창밖을 바라보는 행동에서 작은 위안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다 혼자서 책을 보는 누군가가 눈에 띈다. 영화 '커피 메이트'는 관객이 한두 번은 경험했을 감정을 담고 있다. 현실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서로 전혀 모르는 두 남녀가 만나서 '소울 메이트'가 된다는 설정이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극중 '인영(윤진서 분)'과 '희수(오지호 분)'의 관계성에 대해 가장 많은 의구심을 갖는다. 이 작품을 불륜으로 봐야 할지, 로맨스로 봐야 할지 모호하다는 점. 하지만 이 영화를 '불륜'이라는 틀에서만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커피 메이트'의 초점은 비록 한 순간이었지만 깊은 교감을 통해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선 한 여성에게 맞춰져 있다.

'커피 메이트'에서 이현하 감독이 로맨스를 보여주는 방식은 정적이며 세심하다. 이 영화는 자신만의 비밀언어를 사용하는 가구 디자이너 희수와 전업주부인 인영이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플래시백은 그들의 과거를 요약적으로 보여줄 때에만 잠깐 등장한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정해진 시간 동안 함께하는 희수와 인영의 투 샷은 겉보기엔 평온하다. 하지만 그들이 마시는 커피처럼 부담감 없는 관계는 커피 특유의 향과 각성 효과처럼 중독성 있는 관계로 확장된다. 배우들의 표정연기와 많은 대사량은 이현하 감독이 두 남녀의 내면을 심층적으로 세공하는 시도의 연속이다.

이들이 먼저 스킨십이나 육체적인 관계에 탐닉했다면 '커피 메이트'는 전형적인 '어느 기혼 여성의 일탈' 정도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영과 희수는 정신적으로 깊게 소통한다. 대화의 영역은 각자의 일상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비밀을 공유하는 범주로까지 확대된다. 희수는 대학생 때 첫 사랑했던 여자 친구에 대한 아픔을 안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도 그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인영은 고등학생 때 있던 일 때문에 누구의 진심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우연한 만남이었지만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가장 충만하고 따스한 시간을 보냈던 그들. 두 사람은 서로 이해하고 아픔을 나누면서 소울 메이트가 된다.

<사진제공=(주)스톰픽쳐스코리아>

비밀을 나눈 사람들이 같이 할 수 있는 것들은 많다. 희수는 인영에게 '일탈의 즐거움'을 알려준다. 인영은 희수 때문에 그동안 남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면서 소소한 즐거움을 찾는다. 게임 벌칙으로 길거리에서 애국가 부르기, 얼굴에 봉지 뒤집어쓰기 등등. 남들이 보기엔 황당한, 상식 밖의 행동들이다. 그러나 극중 인영의 말처럼 희수의 얼굴을 볼 때마다 들었던 욕망은 "봉지 하나만 뒤집어썼을 뿐인데 세상이 달라 보였어"라는 해방감으로 전이된다. 그동안 억압되어 있던 감정들을 말로 풀어내고, 누군가가 그것을 들어주고, 새로운 삶의 통로도 있음을 알려주었다는 점. '커피 메이트'는 '카페'라는 제한된 공간을 통해 언어와 감성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면 여전히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가 설득력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장소에도 있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카페는 제작진이 100여 곳 넘게 로케이션 한 끝에 결정한 장소다. "하루 종일 직광이 들어오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는 이현하 감독의 말을 유추해보면 카페가 인영의 상실감을 표현하는 상징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급스럽지만 심플하고 채광이 거의 없던 인영의 집처럼 카페 내부는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고 항상 은은하다. 겉보기에는 큰 변화 없이 고요하게 흘러간 인영의 삶처럼. 감독은 탁 트인 통유리와 그 너머로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을 보여주며 인영의 시간 또한 현재진행형임을 암시한다.

인영을 맡은 윤진서는 외적으로는 차분하지만 심적으로 요동치는 감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며 관객의 마음을 뒤흔든다. 바늘로 귓불이나 입가에 구멍을 뚫는 행동은 가학적으로 다가올 수 있으나, 인영의 감정에 집중한다면 그녀가 자신만의 삶을 살기 위한 성장통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과거의 선택으로 현재 인영이 존재하듯, 지금의 인영은 새로운 선택을 하며 '진짜 자신'과 대면한다. 대사량에 대한 부담감으로 인해 카페 촬영 전날에는 대부분 선잠상태였다고 한다. 정성껏 인영의 감정을 보여준 윤진서 덕분에 관객은 요즘 만나기 드문 새로운 인물을 만날 수 있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