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마음 위를 걷다, 영화 "다른 길이 있다"
얼어붙은 마음 위를 걷다, 영화 "다른 길이 있다"
  • 스타포커스
  • 승인 2017.02.06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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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_poster <사진제공=몸. 무브먼트>

한강이 '도토리묵'처럼 생겼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도토리묵의 표면처럼 출렁거리는 물결을 보고 연상한 이미지다. 그렇게 유연하게 움직이던 표면이 굳게 얼어붙었다. 단단해져 그 어떤 무엇으로도 한 번에 깰 수 없는 상태. 그 모습처럼 영화 '다른 길이 있다'의 주인공들의 마음 또한 그렇다. 수완(김재욱 분)과 정원(서예지 분)은 인터넷에서 함께 동반자살을 계획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걷고자 했다.

검은 봉지가 나무에 걸려 휘날리는 모습을 보고 마치 자신의 모습처럼 보였다는 수완은 평범한 경찰의 신분으로 살아간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남과 다를 것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그가 '검은새'라는 대화명으로 함께 죽음을 맞이할 동반자를 찾는 연유가 무엇일까. '다른 길이 있다'에서는 수완의 아픔을 어머니의 자살과 연관시켜 직접적이지 않는 방식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 그의 마음에 아픔을 만든 것은 아버지의 태도가 아니었을까. 영화 초반에 음주운전을 한 운전기사가 애원하자 수완이 그냥 보내주게 되고, 그 운전기사가 직후 교통사고를 일으키자 적반하장으로 수완에게 책임을 물었던 것처럼 아버지의 태도 또한 그렇다. 자신과 아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며 아내의 죽음을 아들인 수완의 탓으로 돌린다. 어머니의 외도를 어린 마음에 아버지에게 알린 수완이 정말 어머니를 자살로 이끈 것일까. 어른들의 문제에 그저 목격을 했단 이유만으로 수완에게 책임을 돌린 아버지의 회피가 그를 지치게 만들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마음을 만들어냈다.

'흰 새'라는 그녀의 대화명처럼 새하얗고 청순한 이미지가 어울리는 정원의 삶은 지옥과도 다를 바 없는 삶이다. 식물인간의 어머니, 밤마다 자신을 찾는 아버지. 벗어날 수 없는 삶에서 정원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떠나려는 것은 자유로워지고 싶어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아닐까. 굉장히 어둡고 우울한 상황에서도 정원은 무표정으로만 일관한다. 단 한번도 울어본 적 없는 사람처럼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그녀가 엄마와의 마지막 통화에서 펑펑 눈물을 흘린다. 춘천으로 여행 온 정원에게 "다음엔 나도 데려가"라는 엄마의 대답에 항상 괜찮다는 말만 일관하던 그녀도 무너지는 순간이다. 죽음을 준비하는 공포보다 남아 있을 엄마에 대한 걱정에 눈물을 흘리는 순간조차 정원은 자신을 위해 울진 못했다.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아픔을 가진 이들이 춘천에서 마지막을 살아가는 시간들을 어둡고 무겁게 표현하기 보단 일정한 톤으로 덤덤하게 표현한 점이 영화의 가장 포인트이다. 정적이고 천천히 흘러가는 모든 장면들을 통해 그들의 고통과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인생에 애정을 계속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시작으로 '다른 길이 있다'를 구상했다는 조창호 감독의 말처럼 멜랑꼴리한 감정을 유지하지만 결말에 다다를수록 위로가 되는 지점들이 있다. '검은새'와 '흰 새'가 우연히 만나는 순간부터 어쩌면 우리는 마음속으로 빌지 않았을까. 위태롭게 시작된 그들의 만남이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기적이 되기를. 땅땅 얼어붙은 호수에도 봄은 찾아오고 다시 도토리묵처럼 출렁이는 마음을 수완과 정원이 가질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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