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 변화하기에 살아있는 이준익
"동주", 변화하기에 살아있는 이준익
  • 스타포커스
  • 승인 2016.07.26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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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er.이명수 photographer.이명수

설득은 폭력이지만 설명은 의무다

이준익 감독을 상징하는 가장 강력한 키워드는 사극일 것이다. 왕의남자, 황산벌, 평양성,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그리고 최근의 사도까지 그의 사극은 이미 명품으로 정평 나있다. 하지만 필자는 장르의 일관성보다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명대사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디지고, 사람은 이름 때문에 디지는 거여 - ‘황산벌’”, “이기는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고,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기야 - ‘평양성’”, “양반은 권력 뒤에 숨고, 광대는 탈 뒤에 숨고, 칼잽이는 칼 뒤에 숨는다고 -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그의 영화에는 언제나 치밀하게 세공된 보석 같은 대사들이 빛났다.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하다. 감독님 영화를 어려서부터 참 많이 봐왔다. 그중에서 황산벌, ‘평양성을 참 좋아했다.

질문을 준비하면서 다른 인터뷰들을 참고했다. 솔직히 하나같이 인터뷰가 겉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자가 제대로 질문을 하지 못한 건지, 감독님께서 대답을 피하신 건지 잘 모르겠어서 걱정이다. 어젯밤에 사도를 보고 왔는데, 제가 보기엔 감독님의 영화가 완전히 달라진 것 같다.

맞다. 변하지 않는다면 죽은 거다. 살아 있다는 건 변한다는 거다. 확실히 변하고 있다.

감독님 영화 중에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가장 좋아해서 여러 번 봤다. 그 작품에서도 그렇고 감독님은 항상 치밀한 비유와 상징을 즐기시는 것 같았다. 보는 내내 거기에 숨겨진 메시지를 한 글자라도 더 알려고 애쓰게 되는 영화들이었던 것 같다. 사실 황산벌’, ‘평양성도 가벼운 척 하신 것이 아니냐. 그 안에 들어있는 메시지는 굉장히 무거웠다.

그런데 사도를 보니 이번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시는 게 아니라, 그냥 이야기 하나를 툭 보여주는 느낌이 강했다. 그리고 이번 영화 동주제작보고회를 가보니 제작자가 영화의 의미를 정해서 일방적으로 전달하려는 것은 나쁜 짓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변화와 발언 사이에 연관성이 있는 것인가.

당연히 연결점이 있다. 나는 기성세대가 되었다. 내가 살아왔던 사회에 가장 중요했고, 또 내 성장기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가치는 바로 집단이다. 공동체의 가치. 모두 못살았으니 개인차가 현격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데모도 많고 패거리로 몰려다니는 문화에서 성장했다. ‘평양성’ 때까지는 사회와 집단의 관계에 집착을 했던 흔적이 있었다. 그런데 21세기 와서는 서구 자본주의를 우리 문화가 완전히 흡수하면서 개인화, 개인주의가 확연해졌다. 나도 의도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더라. 사회가 변화하면서 나의 세계관도 변화하는 것 같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얘기해보자면, 집단의식의 뜨거움이 있는 사람은 그 영화를 좋게 보고 좀 더 먼저 개인주의에 도달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불편했을 것이다. 영화관객의 세대는 바뀌고 지금은 젊은 세대다. 집단이나 공동체보다는 개인이나 가족 같은 작은 단위의 드라마가 관객들에게 공감을 이끌어낸다. 거기 발맞춰가는 것이라 보면 되겠다.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하다. 내 세대가 추구했던 것과는 분명히 다르니까. 하지만 개인주의의 효율성이나 순기능도 이해하지 못하고 불통한다면 꼰대 소리를 듣는 거니까. 변신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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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많이 했는데 흔쾌히 이야기해주셔서 감사하다. 보통 사도세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나 소설은 항상 권력과 당쟁의 희생양으로 그를 그리기 마련인데, 독특하게도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로만 풀어내시더라. 조금만 과장하자면 발달심리학 교재로 써도 될 것 같았다. 하시던 말씀과 연결되는 부분인가.

영화로 역사공부를 시키는 시대는 지나갔다. 사도세자를 사대부 권력 투쟁의 희생양으로 보는 관점은 지배 세력과 피지배 세력 구도로 한 개인을 바라보는 것이다. 지금의 세대는 그런 것보다 개인과 개인의 소통에 더 반응한다. 사회 구조의 변화가 대중의 반응에도 반영되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의 변화가 사회 구조의 변화로도 설명될 수 있지만 시대정신의 변화로도 설명될 수 있는 것 같다.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방향성이 감독님의 영화에도 생겨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까 말씀하시던 중에 사회가 점점 개인화되어가는 현상이 아쉽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미학적인 영역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포스트모더니티는 유럽에서 시작해 미국에서 꽃을 피웠다. 1950년대부터 시작된 이 물결을 우리나라는 지금 급물살로 맞고 있는 상황이다. 모더니즘 이전,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이 굉장히 혼재되어 있다. 세대 간의 갈등, 계층 간의 갈등, 지식 갈등이 너무 많다. 파편적이고 산개된 개인들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를 포스트모던하다는 사조로 그냥 묶어버리는 것 같다. 아무도 정리를 해내지 못하니 교육부터 한국의 근현대사를 명확하게 교육받을 수 없었다는 게 불행이라 본다.

그래서 그 부분을 영화를 통해 탐험하는 것이다. ‘동주’를 찍은 이유도 그렇다. 이제는 근대를 극화할 필요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현대극과 고대, 중세를 배경으로 한 극들의 사이를 메워야 한다. 그런데 그 사이가 굉장히 뒤엉켜있어 안타까운 것이다. 이런 시기를 잘 정리해낼 수 없다는 게 참 안타깝다. 윤동주도 이런 고민 중에 그런 주옥같은 시가 나오지 않았을까.

다음 세대에 대해서 이런 고민을 해주고 계셨다는 게 너무나 감사하다. 지금의 1020대가 기성세대와의 관계에 있어서 참 상처를 많이 받는다. 이런 젊은 세대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을 것 같다.

나는 지금의 10대 20대가 이전의 세대보다 더 우수한 사회관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지금까지 걱정했던 역사와 정체성에 관한 문제도 선명하게 정리해 낼 것이다. 40, 50, 60대는 자신이 처한 입장 때문에 역사를 투명하게 정리할 수는 없는 사람들이다. 젊은 세대가 이들을 철저하게 부정하되 명확한 방향성을 잡아야 한다. 서양과 동양의 간격을 정확히 구분해야 한다. 우려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 경계에 대한 변별력이 떨어질까 하는 것이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돕는 노력으로 십 몇 년 전에 사극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왕의 남자’나 ‘황산벌’같은 영화가 대표적으로 이런 의도가 다분히 담긴 영화다. 전복과 역설을 통해서 그 변별력을 얻는 것이다. 온전한 지식이란 반대논리의 지식을 포함하는 것이어야 한다. 반대가치를 폄하한다거나 배제한다면 온전한 지식으로 지속할 수 없다.

감독님이 참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이런 걱정을 같이 하시는 다른 어른들이 있다. 다른 영화감독님들도 그럴 것이고. 보통의 어른은 내가 가르쳐야겠다, 계도하리라하는 생각을 하게 마련인데, 감독님은 오히려 그런 면을 내려놓고 그저 사람 사는 모습을 툭 보여주기만 하는 방식으로 변하셨다는 게 놀랍다. 답답하지 않나.

계도나 계몽주의, 최근의 새로운 계몽주의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하는 파시즘적인 행보도 많긴 하지만, 계몽 자체도 사실은 또 다른 폭력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가능성을 말살하는 영향이 더 크다고 본다.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가르치나, 그저 설명할 뿐이지. 가르친다는 건 이해와 설득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나는 그게 아니라 설명을 해야 된다고 본다. 단, 그 설명을 듣고 이해되고 설득되는 사람이 있으면 고마울 뿐이고, 그렇지 않다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 답을 던져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폭력이다. 함부로 가르치는 것처럼 나쁜 게 없다. 하지만 동시에 설명도 안하는 것은 기성세대로서의 직무유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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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적인 질문일 수도 있는데 이런 상황도 있지 않겠나. 감독님의 영화 사도를 보면 바뀌신 스타일대로 특정한 메시지로 몰아가지 않으니, 분명히 누군가는 와 유아인 잘생겼다 멋있다.’하고 영화 감상을 끝낼 수도 있고, 컬트문화가 대중가요에서 영화로 전이되는 현상도 최근에 많은데, 영화 자체가 아니라 배우의 이미지에만 탐닉하는 현상도 많을 것이다. 이런 지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 설득은 아니어도 설명은 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과연 설명은 충분히 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사도’가 컬트영화라고 본다. 관객 100중에 영화를 제대로 본 사람은 많아봐야 50일 것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생산과 유통이 지속되려면 이득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야 재생산할 것이 아닌가. 이것이 산업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의 이슈, 화제를 갖게 하기 위한 방법은 탐미적이고 유미적인 표현을 쓰는 것 밖에는 없다. 주인공의 매력, 트렌드에 맞는 센스 있는 감각들을 전달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의식과 무의식이 동시에 인지작용을 한다. 의식은 호기심과 탐미 욕구를 담당하겠지만, 무의식에서는 분명 그 안에서 다른 무언가를 찾아내고 있을 것이다. 이야기가 주는 가치를 동시에 섭취하고 있을 거라 믿는다. 지나치게 가르치는 컨텐츠는 강제성 때문에 오히려 무의식에서 반발한다. 나의 방식은 감정, 감각적인 것에 몰입하게 만들면서, 거기서 추출되어 나오는 것을 무의식에 장착시키는 것이다. 그 의식과 무의식의 싱크로율이 딱 맞으면 개인과 집단에게 사조를 발생시키고, 장르화되고, 반복적으로 소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방향으로 나가려 한다.

의미를 무의식에 장착시킨다는 말이 새롭고 인상적이다. 다른 인터뷰에서도 그렇고 아까 얘기해주신 것도 그렇고, 큰 실수를 했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실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감독님의 변화에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작업을 많이 해 본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부족함에 고통스러워한다. 부족한 결과물을 만들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더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실수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큰 실수를 줄여야겠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몇 십 년에 걸쳐서 자신의 부족함을 만회하려는 시도들을 관통하는 어떤 것을 만나게 된다. 그 지점을 나도 만나보고 싶은 것이다.

후배들을 볼 때면, 그들의 실수가 아름답기를 바란다. 실수는 해야 한다. 실수로부터 자각이 일어나고 더 큰 실수를 하고 계속 쌓아나가는 것이 그 사람이 편향되지 않은 올바른 가치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다. 실수가 두려워서 기존 세대의 매뉴얼 안에서 적당히 끼어있는 삶을 사는 젊은이는 결코 미래의 가치관에 도달할 수 없다.

아무튼 내 실수는 함부로 말하는 것이었다. 영화 속에서 과도한 주장을 하고 찍으면서도 그 영화를 다시 들춰보지 못했다. 그 주장들이 낯 뜨겁다. 누군가는 내 과도한 주장을 적절한 수준에서 알아들어 주기도 한다. 개떡같이 말했는데 찰떡같이 알아들으면 고맙지만, 내가 개떡을찰떡이라 주장하면 안 된다.

또 금전적인 부분도 있다. 돈에는 사람들의 사연이 얽혀 있다. 사연 없는 돈은 1원도 없다. 액수가 클수록 더 그렇다. 그런 돈에 내가 손해를 끼치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적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문제 때문에 사람들의 미래나 윤택한 생활이 유실되고 삶이 파괴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숙명적으로 창작자는 실수가 실패로 되었을 때 자책할 수밖에 없다.

제작보고회에서 흑백영화로 제작한 이유에 대해서 흑백이 제작비가 적게 든다는 말씀을 하셨다. 웃으면서 말씀하시기에 저도 웃고 넘겨들었는데, 진지하게 하신 대답인건가. <동주> 제작비가 6억 정도로 굉장히 저예산에 속한다고 들었다.

윤동주 시인을 영화로 만드는데 결과가 실패라면... 이건 한 명의 감독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짐이다. 사표 써야 된다. 대중들에게 정말 심한 욕을 듣게 될 것이다. 다른 어떤 사람이 충분히 시도해서 성공시킬 수 있는 기회를 뺏는 것이니까. 그래서 결과가 실패일 수 없는 비용을 들이려 했다. 그래야 과정이 무시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오히려 이런 것이 윤동주 시인이 가진 부끄러움에 미학에 어울리는 제작이 아니겠나.

동주보도자료를 보자마자 이건 무조건 대박이라고 생각했다.

왜???

윤동주잖아요!” 심지어 이준익 감독이라고 써있는 걸 보고는 영화 이야기를 나눈 모든 친구들에게 상반기는 '동주'라고 이야기 했다. 그런데 당연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나처럼 흥분하며 기대해주는 사람도 있지만 아닌 사람도 많았다. 그래도 제작비가 6억이라고 하니 다행이다.

내가 뜨겁다고 해서 남도 뜨거울 것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 안 뜨거울 수 있다. 그런 사람에게 얼마나 설득력 있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가 문제다. 속으로는 자신감이 있으나 그만큼 영화가 못 나오면 그건 큰일이다. 그럴 거면 차라리 장르영화를 찍지 이런 영화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그래서 6억인 거다. 뜨겁지 않은 사람의 숫자가 훨씬 많다.

동주를 만들기 전, 혹은 만드는 중에 예술가로서 느꼈던 영감을 듣고 싶다.

나는 1907년생이신 할아버지와 한 방을 10년 동안 썼다. 어린 시절에 일제를 거치고 40대에 6.25를 겪고 60년대에 나와 한 방을 쓰셨다. 그 분이 가지고 있는 사회관, 인간관, 세계관들을 어린 나이지만 세포로 배웠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그 시기에 내가 배웠던 것에 대해서 생각했는데 명확한 정의를 내릴 수가 없더라. 그러다보니 사극, 역사, 이런 쪽으로 나이를 먹을수록 관심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자연스럽게 끌리는 것 같다. 요즘 친구들은 할아버지와 함께 성장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보통 자기 방이 있고 아파트가 확대되면서 개인주의도 가속도가 붙지 않았나. 나 같은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이건 개인적인 것이고 영화에 숨은 의도가 하나 있다면, 동주가 1917년생이다. 서정주가 1915년생이다. 윤동주보다 두 살 많다. 서정주가 쓴 대표적인 친일 시가 젊은이들의 가미가제 지원을 독려하는 ‘오장 마쓰이 송가’다. 그 시가 나온 게 1944년 11월쯤일 거다. 그 시가 쓰이고 있을 때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주사를 맞으며 죽어가고 있었다. 그 때 1918년생인 장준하는 6000km를 걸어 광복군에 합류했다. 이런 사실들에 대한 묘한 아이러니를 느꼈다. 이것을 영화에 그대로 넣지는 못하지만, ‘동주’라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하나의 이유로 작용했다.

귀한 얘기 해주셔서 감사하다. 이번에 송몽규 역할을 맡은 박정민 배우의 팬미팅을 우리 잡지에서 주최하고 진행한다. ‘동주주연인걸 알기 이전에 계획했던 작업이라 땡잡았다생각했다. 당장 오는 토요일에 진행된다. 박정민 배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

내일 모레 시사회에서 ‘동주’를 보게 되면 알거다. 박정민은 엄청난 배우다. 영혼이 연기를 통해 새나오는 연기법을 가지고 있다. 연기를 힘으로 하는 게 아니고 자기 영혼을 그대로 투영한다. 메소드가 굉장히 깊다.

윤동주의 시 자화상을 송몽규와의 관계를 통해서 해석하셨다. 학교에서는 배우지 못했던 해석이라 자세히 듣고 싶다. 학계 선행 연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설득력 있었다.

윤동주의 ‘자화상’이 송몽규에 대한 열등감으로 읽히더라. 실제로 윤동주가 그랬다. 1935년에 송몽규가 지금도 엄청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다 꽁트로. 그때 윤동주는 시를 쓰고 있었다. 열등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다. 연전을 졸업할 때에도 송몽규는 우등상을 받았다. 그 때 교장이 친일파 윤치호였고 송몽규는 그에게 부상으로 받은 대동아공영정도를 집어던진다. 그 장면을 졸업식에서 윤동주가 목격한다. 교토제국대학도 같이 지원했는데 송몽규는 붙고 윤동주는 떨어졌다. 그래서 윤동주는 기독교학교인 닛쿄 대학으로 갔다. 거기서 송몽규가 있는 교토로 편입해 간 곳이 도시샤 대학이다. 거기서 붙잡혀 수감된 것이다. 결국 윤동주는 끊임없이 열등감에 시달리며 살아왔다고 봐도 좋다. ‘자화상’은 자기를 거울삼아 쓴 시인데, 윤동주의 내면에 가장 큰 사람이 누구였을까. 나는 송몽규라고 본다. 대상이 없으면 열등이 안 생긴다. 그 대상은 분명 송몽규다. 3달차이로 태어나서 한 달 차로 죽었고, 같은 장소에서 태어나 같은 장소에서 죽었다.

송몽규가 없었다면 이 영화는 못 만들었을 것이다. 윤동주는 유명한 시집 때문에 지금가지 기억되는 것인데, 과정은 송몽규가 훨씬 더 아름다웠다. 과정이 무시된 사회에 단면을 발견하게 하고 싶다. 세상사람 중에 결과가 화려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과정이 아름다운데 결과가 없어서 평가 절하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과정을 평가해주는 사회가 훨씬 더 건강한 사회가 아닐까.

이성진 chilecam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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