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과 결과의 가장 완벽한 화해 ‘동주’
과정과 결과의 가장 완벽한 화해 ‘동주’
  • 스타포커스
  • 승인 2016.07.09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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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딜라이트 사진제공=딜라이트

시인 윤동주(강하늘 분)와 독립운동가 송몽규(박정민 분)는 일가친척이다. 만주 명동촌의 같은 집에서 3개월 차이로 나고 자랐다. 윤동주는 어려서부터 시인이 되고 싶었으나 쉽사리 시집을 내기는 어려웠다. 송몽규도 글은 쓰지만 작가의 꿈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다. 윤동주는 송몽규에게 열등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들은 연희전문학교와 일본 유학생활을 함께 하며 문예지를 내는가 하면 갈등도 빚는다. 송몽규는 글쟁이라기보다는 당장 행동하는 독립운동가였고, 윤동주는 시로써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이상주의자였다. 유학 중 송몽규의 한인 단체 활동으로 인해 둘은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혀 취조를 받는다. 생체실험 목적으로 수감자들에게 주입한 주사로 인해 윤동주는 형무소에서 사망한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송몽규 또한 형무소에서 사망한다.

인간은 보이지 않으면 볼 수 없다. 인간이 보는 모든 것은 보이는 것이다. 이 사실이 우리가 가진 가장 슬픈 운명이다. 학창시절 이른 아침상, 국인지 찌개인지 모를 김치요리는 보이지만, 새벽부터 주방에서 씨름한 우리 엄마의 고생은 보이지 않는다. 일에 치여 2주 만에 겨우 하는 데이트, 그나마도 최악으로 망쳐버리는 애인의 짜증은 보이지만 그가 2주간 겪었을 그리움과 원망, 그리고 그런 감정을 가지는 자신조차 싫었던 자학의 시간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 귀한 아침상을 반이나 남겨왔고 자존심을 세우며 언성을 높이다 친구들과 이별의 고배를 나눠야 했다.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다. 결과물은 승리한 자만이 남길 수 있고 우리는 그 결과물만을 볼 수 있다. 역사학계야 다양한 관점으로 여러 사료에 접근하겠지만 여전히 대중 일반이 알고 있는 역사엔 패배자, 피지배자에 대한 페이지가 없다. 중종반정으로 물러난 연산군은 가족의 비극으로 인해 미쳐버린 폭군이자 살인마일 뿐이고 조선 후기의 작고 실적 없는 민란들은 ‘민란들이 잦았다’정도의 문장으로 일축된다. 피 뭍은 적삼을 보기 이전의 연산군의 정치와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려 발악했지만 결국 아래로 굴러 떨어져버린 민초들의 이름은 당연하게도 무시된다.

사진제공=딜라이트 사진제공=딜라이트

'동주'의 두 주인공인 윤동주와 송몽규도 누군가는 기억되고 누군가는 기억되지 않았다. 두 인물이 싸워 승패를 겨룬 것은 아니지만 후세의 평가가 그들을 갈라놓았다. 윤동주는 가까스로 시집을 남겼다. 생전에 출판되지 못하고 수 년 뒤에야 세상 빛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 한 번의 결실이 그를 전 국민이 기억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비록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했으나 그의 시와 문장은 교과서에서, 대학에서, 또 수많은 문화 컨텐츠에서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반면, 우리에게 송몽규는 국문학 학위를 위해 윤동주를 연구하다 발견하는 것 외에는 알 도리가 없는 인물일 것이다. 윤동주는 보이고 송몽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윤동주를 보고 송몽규를 보지 않았다.

'동주'라는 제목을 처음 듣고 윤동주를 떠올리기도 사실은 힘들다.

누가 앞에 윤을 붙여주면 그제야 ‘아! 윤동주~ 그 사람 얘기야?’하게 된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과하게 깜짝 놀라는 반응도 기대해볼만 하다. 필자가 그러했다. 그의 시가 가진 매력이 그의 시시콜콜한 인생사까지 궁금하게 만들 정도기 때문이다. 그랬던 나를 비롯한 우리에게, 윤동주는 항일시인으로 정리되어 있다. 지금은 없어진 수능 근현대사 영역을 공부할 때면 일제 강점기의 항일 시인으로 윤동주, 이육사를 외워놓곤 했다. 아마 나는 영화를 통해 윤동주가 시를 통해서 어떻게 시대를 짊어졌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 같다.

결론적으로 나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목적 자체가 틀렸으니까. 엄밀히 따지면 윤동주는 항일 시인이 아니다. 암울한 시대상이 그의 시세계에 반영되었을 뿐, 요즘 말로 그는 일본 제국주의를 ‘저격’한 적이 없다. 누구나 시대에서 벗어나 살 수는 없을 뿐, 윤동주가 목숨을 걸고 조국 독립에 이바지하기 위해 시를 쓴 것이 아니다. 그는 ‘참여 예술’의 반대 의미로서의 순수 예술가였다. 자신의 감성을 흙 삼고 시대를 불 삼아 고운 자기를 구워낸 것이다. 그 자기로 일제 앞잡이의 뒤통수를 후린 적은 없다.

19세에 그는 지금도 여전히 권위를 유지하고 있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다. 한집에서 나고 자란 윤동주는 그런 그에게 열등감 느낀다. 굳이 사료를 뒤져 고증하지 않더라도 윤동주도 사람이기에 이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윤동주에게 열등감을 던져준 송몽규는 돌연 학업을 중단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20세에 감옥신세까지 지고 돌아온 그는 윤동주에게 또 하나의 불편함을 선사한다. 영화에서 대사로 직접 표현되진 않았지만, 시인이 되고픈 자신보다 글도 잘 쓰는 단짝이 행동마저 화끈하니 적잖이 뒤처지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학업에서도 송몽규는 윤동주를 언제나 앞질렀다. 둘이 같이 다닌 연희전문학교에서도 송몽규는 우등졸업이었다. 당시 일본인도 쉽게 들어갈 수 없던 교토대학도 송몽규 혼자 합격하고 윤동주는 떨어졌다. 그럼에도 송몽규는 재일 한인 학생들을 규합해 일본 제국주의에 반항했고, 윤동주는 그런 그를 지켜만 보았다. 한국 문학이 가진 가장 큰 보물인 윤동주의 ‘부끄러움’은 송몽규가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주'는 윤동주의 ‘자화상’을 송몽규를 통해 해석한다. 우물에 비친 자신이 미웠다가, 가엾다가, 그리운 화자는 송몽규에 자신을 비춰보았을 윤동주와 너무나 비슷하다. 송몽규가 아니었다면 이 시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 할 정도다. 윤동주는 송몽규가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의 주된 정서인 부끄러움과 죄의식은 가진 능력마저 포기하고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치던 송몽규와의 간극에서 비롯한 것이다.

영화의 목적이 한국 근대사 교육은 아니다. 윤동주 연구도 아니다. 이준익 감독은 결과와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제작보고회와 인터뷰에서 언급했다. 시에만 젖어 무기력했던 윤동주가 맺은 결과는 이제라도 화려하지만 시대에 직접 부딪히다 산산조각난 송몽규의 비장미는 이렇다 할 결과가 없다는 이유로 기억되지 않는다. 과정은 보이지 않지만 결과는 남아 보이기 때문이다. 비록 삶의 방식은 달랐으나 출생과 죽음까지 함께 했던 두 동반자를 우리는 상식의 칼로 갈라놓은 것이다.

'동주'는 그 틈을 메워내는 작업이다.

영화의 후반부부터 윤동주와 송몽규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취조를 당한다. 송몽규가 주가 됐던 한인단체 활동으로 인한 치안유지법 위반이 둘의 죄목이었다. 송몽규는 조서의 내용이 하나같이 사실이었고, 덩달아 붙잡혀온 윤동주는 하나같이 지켜만 본 것들이었다. 둘은 조서에 혐의를 인정하는 서명을 하도록 강요받았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갈라놓았던 윤동주와 송몽규는, 그들의 화려한 결과와 아름다운 과정은 화해한다. 물론 윤동주와 송몽규는 같은 감옥에서라도 만난 것을 반가워해 본 적도 없이 각각 죽어갔지만, 영화 속에서 그들이 함께한 여정은 또 함께 마무리 되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만든 사람이고 스티브잡스는 애플을 만든 사람이다. 이준익은 ‘왕의 남자’를 만든 사람이고, 유아인은 그의 영화 ‘사도’에 나온 사람이다. 우리는 사람을 정의할 때 언제나 결과를 이용한다. 과정이나 결과나 지난일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굳이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숱한 과거 중에서도 무언가 갈무리되고 성과가 나는 지점, 즉 고정되어 눈에 보이는 지점이다.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이 현상에 '동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사람을 알고 이야기한다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충분한가 묻는다.

이준익 감독은 '동주'에서도 관계에 집중했다.

결과는 홀로 서지만 과정은 그렇지 않다. 윤동주의 시집엔 송몽규가 없지만 시를 쓰던 윤동주의 마음을 송몽규 없이 설명할 수 없다. 20세기, 화이트헤드로부터 시작했던 과정철학은 인간이 과정과 관계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인간은 고정된 결과나 목적이 아닌 흐르는 과정속의 한 순간이다. 그 순간들은 다른 개체와의 관계에서 독립될 수 없다. 관계의 다발인 순간에서 인간은 새로운 것을 창조해낸다. <동주>를 철학적으로 해석하자면, 이미 우리의 인식 속에 명확히 고정되어 있던 윤동주를 과정 속에 풀어헤쳐 순간순간의 감정들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그리고 송몽규는 윤동주의 과정을 구성하는 데에 가장 큰 요인으로 그려졌다. 가장 매력적인 점은 윤동주의 결과가 아닌 과정에 집중함으로써 또 하나의 아름다운 과정인 송몽규를 주목했다는 점이다. '동주'는 화려한 결과 뒤의 부끄러운 과정과 자랑할 결과는 없지만 아름다운 과정, 언젠가 맞춰야 할 이 두 퍼즐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빈틈없이 조립해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위로다. 이 글을 쓰는 나를 포함하여 읽는 당신까지 죽고 나서도 이 사회에 오래 기억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만한 결과물을 남기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한 몇 년이나 일가친척이라도 기억해주면 다행인 것이 사람 일생의 허무함이다. 화려한 타이틀을 달고 죽었다 해서 딱히 저승길이 시원시원한 것도 아니다. 그럴싸한 결과물로 인해 미화되어 이게 누군가 싶거나, 약간의 오점으로 인해 왜곡되어 자식들 고생시키기 십상이다. '동주'는 비록 대스타 윤동주를 다루었지만 그의 그림자에 주목했다. 어느 시대야 아니었겠냐마는, 지금 대중의 절대다수는 사회 전체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한 명의 그림자로서 영화가 그림자에게 보내는 따뜻한 손길이 감사하게 여겨졌다.

영화는 단연코 명작이다. 이 글이 '동주' 연구 보고서가 아니니 미처 다 언급하지 못하는 부분들도 많다. 의미 있는 흑백처리, 담담하고 절제된 스토리 전개, 배우 박정민과 강하늘의 적확한 연기. 하지만 저예산 영화이다 보니 흥행에 대한 관계자들의 걱정이 있는 듯 보였다. 배우 강하늘은 제작보고회에서 흥행이 아니어도 좋으니 최대한 많은 분들이 보셨으면 좋겠다는 애매한 말을 했다. 많이 보는 것이 흥행의 정의 아닌가. 하지만 영화를 먼저 본 입장에서 그 심정이 배우 당사자만큼은 아니겠으나 이해가 간다. 천만 관객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를 보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많기를 바라는 것이다. 쓰고 보니 내 말도 애매하다. 허세는 잠시 접어두고 이 영화는 전 국민이 봐야 한다고 이 에디터 당차게 외쳐본다.

이성진 chilecam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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