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계의 대부 영원한 제임스 본드로 기억 될 ‘배우 남궁원’
한국영화계의 대부 영원한 제임스 본드로 기억 될 ‘배우 남궁원’
  • 스타포커스
  • 승인 2016.07.26 23: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Photographer. 이명수 Photographer. 이명수

한류열풍으로 전 세계가 시끌시끌하다. 문화강국으로 우뚝 선 지금, 묵묵히 후배의 앞날을 응원하는 그가 생각난다. 한류문화의 터를 닦은 대선배로 거목이 된 배우 남궁원이다. 제2의 출발을 꿈꾸는 영화인에게 쉬어가는 그늘이 되고, 앞을 향해 달리는 까마득한 후배에게 모범이 된다. 남궁원이 없는 대한민국 영화계를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남궁원과 많은 원로 영화인들은 평생 피땀 흘리며 토양을 마련했다. 그 양분을 먹으며 한국영화가 성장했고, 현재 세계를 장악한 문화를 이룩했다. 그들의 노력에 후배가 감사함을 표할 차례다.

스타포커스는 매 호마다 한국영화계 발전을 위해 발로 뛴 원로 영화인을 만난다. 이번 호에서는 사단법인 한국영화배우협회 명예회장이자 데뷔 60년을 앞둔 명품배우 남궁원이다. 그는 우리나라 영화배우로 한류열풍에 앞장섰으며,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각종 상을 받으며 국위선양에 기여했다.

오늘날 남궁원은 눈부신 한국영화의 발전 뒤, 원로 영화인들의 현실을 파악하고 대의를 품었다. 젊은 청년을 압도하는 카리스마, 배우 남궁원의 인생과 발자취가 곧 한국영화였고 우리가 향유하는 한류 콘텐츠로 업그레이드됐다. 스타포커스는 ‘한국영화 발전’이라는 외길을 걸은 배우 남궁원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영화를 위해 늘 애쓰신 분을 만나 뵙게 돼 영광이다. 요즘 근황이 궁금하다.

지난해 한국영화인총연합회 회장 활동을 마무리했다. 운동하고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여러 사람과 교류하며 지내고 있다. 지방에 내려가 후배를 응원하기도 한다.

복귀 계획이 궁금하다.

배우는 죽을 때까지 연기해야 한다. 작품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SBS드라마 '여인의 향기' 이후 쉬고 있는데, 다시 연기를 하고 싶다. 늘 무대를 꿈꾸며 살고 있다. 배우에게 은퇴란 없다. 단 한 작품에 나왔다 하더라도 배우는 배우다.

Photographer. 이명수 Photographer. 이명수

지금도 워낙 인물이 출중하시다. 영화로 만나 뵈면 참 좋을 것 같다.

그래도 나이가 들었다(웃음). 얼굴을 애써서 곱게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곱게 늙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배우는 늘 남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평범하게 살 수 없는 직업이기에. 늘 모범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배우로서 자부심이 있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안 듣기 위해 행동 하나에 신경을 쓴다. 배우는 나를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남을 위해 살아야 하는 숙명을 지녔다.

지금까지의 연륜이 얼굴에 다 묻어나는 것 같다. 카리스마 넘치는 배역이 잘 어울릴 것 같다.

요즘 액션 영화가 많다. 영화 '대부'의 알 파치노가 맡은 역, 그런 역을 하고 싶다. 경찰, 정부의 총 책임자 역이 탐난다. 연륜이 있으니까.

얼굴에 두 가지 매력이 있다. 강한 남성미가 느껴지면서도 인자함이 있다. 일일드라마에도 잘 어울릴 것 같다.

손자, 손녀를 돌보며 가정의 기둥이 되는 할아버지 역도 괜찮겠다.

인상이 참 좋고 변화무쌍한 표정, 생동감이 도는 얼굴이다. 어떤 캐릭터도 맞춤형 옷처럼 딱 맞을 것 같다. 배우의 기본자세를 갖고 계신다.

배우는 늘 귀감이 되어야 한다. 배우가 되려면 가정을 잘 다스리고 독서를 많이 해야 한다. 늘 후배들에게 하는 이야기다. 예의 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Photographer. 이명수 Photographer. 이명수

지금도 이렇게 중후한 멋이 느껴지는데, 젊은 시절엔 정말 대단하셨을 것 같다. 별명이 ‘007 제임스본드였다.

당시 한국에서 '007 시리즈'가 큰 인기를 끌었다. 젊었을 때 중국과 합작한 작품에 출연했다. 제임스 본드처럼 정의감이 넘치는 역을 많이 했다.

박력 넘치는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해 특별 관리를 했을 텐데.

윗몸일으키기를 500개 이상, 많을 때는 1,000개도 했다. 액션 영화에 출연할 때는, 매일 5시간 이상 운동했다. 달리기를 하고 계란을 10개 이상 먹으며 몸을 만들었다. 촬영 전 감독님께서 살을 찌우라고 하시면 맥주를 마시고 자거나 밀가루 음식, 감자, 치킨을 먹었다. 반대로 살을 빼라고 주문하시면 밥을 안 먹고 술만 마시며 살을 뺐다. 작품을 준비하면서 자신을 편하게 내버려 둔 적은 없는 것 같다.

출연한 작품이 정말 많다. 그중에서 대표작을 꼽는다면.

유현목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순교자'에서 이 대위 역을 맡아, ‘부일상’남우조연상을 받았다. 최하원 감독이 연출한 '다정다한'에 출연해 ‘대종상영화제’남우주연상을, 이어 '피막'에서 다시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는 두 차례 상을 받았다. 이만희 감독의 '여섯 개의 그림자'로 남우조연상을, 이후 신상옥 감독의 '전쟁과 인간'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300편 가까이 되는 작품에 출연했다. 흔한 말로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했을 것 같다. 힘들진 않았는가.

그땐 겹치기 출연이 많았다. 내가 워낙 바쁘니 아내가 의상을 챙겨주곤 했다. 배우가 출연 스케줄이 많아 바빠지면 가정에 소홀할 수 있다. 가족에게 신경 쓰지 못하고 자기 관리만 하는 것이다. 나 역시 한때 그랬지만 가정을 위해, 자녀를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내와 함께 고민했다. 신앙심으로 자녀를 키우고, 자녀들의 꿈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촬영할 때 큰 상처를 입었다고 들었다.

정진우 감독의 '하얀 까마귀'를 촬영할 때의 일이었다. 북한에 납치됐다가 아내를 잊지 못해 남한에 다시 온 주동인 역을 맡았다. 항상 이기는 편 역을 맡아서, “이번엔 다른 캐릭터를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바닷가에서 촬영하는데 큰 사고가 났다. 4개의 물기둥이 올라오면서 몰래 잠입하는 장면이었다. 그때 1개의 물기둥이 잘못 폭발했다. 사망자가 발생한, 안타까운 사고였다. 나 역시 얼굴에 중상을 입었다. 안면부만 24바늘을 꿰맸다. 당시 언론에서 ‘남궁원 중태’라고 보도했다.

배우에게 꽤 힘든 시간이었을 것 같다.

홍콩에 실력이 좋은 의사가 있다고 하더라. 붕대를 칭칭 감고 홍콩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스튜어디스들이 친절히 잘해줬다. 나에게 힘내라고 응원한 것 같다. 그런데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의 아내다. 먼저 “저녁에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고 아내가 기꺼이 승낙했다. 이게 운명이었다. 고난 중에 감사할 일이 생겼다. 아내와 그렇게 인연이 닿았다.

애처가로 유명하다. 반지가 눈에 띈다. 의미가 있는 반지 같다.

독일의 문호 프리드 횔더린은 “인생은 고통에서 양분을 얻는다”고 말했다. 아플 때 만난 아내와 행복하게 살고 있다. 약혼식 때 내 이니셜과 아내의 이니셜을 넣어 만든 반지다. 늘 나와 함께하는 반지다.

여배우와 출연한 작품이 많았다. 귀여운 질투는 없었는가.

신상옥 감독의 '내시'가 개봉했을 때의 에피소드다. 베드씬이 있었다. 시사회 때 아내와 함께 봤다. 처음엔 아내가 연기를 잘했다고 칭찬했다. 내 연기력을 보고 관객으로서 응원한 것 같다. 그런데 '내시'가 개봉한 후 아내가 조금 달라졌다. 주변에서 “베드씬 수위가 높다” “진짜 괜찮냐?”이런 얘기를 한 모양이다(웃음). 여배우와 사랑하는 장면을 찍는 날엔, 아내가 “오늘 촬영 재미있겠다”고 농담을 던지곤 했다. 그렇게 아내와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다.

1958년 영화 '그 밤이 다시 오면'으로 데뷔했다. 1960~1980년대는 여러모로 제약이 많았던 시절이라고 들었다.

영화 '내시' 때문에 법정에 서기도 했다. 당시 32만 명이 관람한 흥행작인데 외설 논란에 휩싸였다. ‘제19회 베를린영화제’에 출품될 정도로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었는데도, 그런 일이 있었다. 신상옥 감독이 피고로 재판을 받았다. 그때 증인으로 나서서 '내시'의 작품성에 대해 설명했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한류문화 1세대로서 보람이 있을 것 같다.

우리 세대가 한류의 포문을 열었다. 지금 인기가 많은 후배들처럼, 해외에 가면 공항에서 팬들이 기다렸다. 백화점에 가도 팬들이 따라왔다.

Photographer. 이명수 Photographer. 이명수

할리우드 진출을 고사했다고 들었다.

영화배우가 되기 전 유학을 가기 위해 영어 공부를 했다. 어머님이 중병에 걸리셔서 공부를 포기하고 영화배우가 됐다. 장남으로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 연기를 시작했다. 나중에 테렌스 영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오! 인천'에 출연했다. 유학을 준비하며 했던 영어 공부가 도움이 됐다. 그때 미국 진출 제의를 받았다. 세 명의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 입장에서 고심했다. 결국 가정을 선택했고 할리우드 진출을 포기했다.

가정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자녀 교육도 특별했을 것 같다.

예의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친구 집에 가면, 어른에게 먼저 인사드려야 한다고 가르쳤다. 늘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할리우드에서 보지 못해 아쉽지만 한국영화계 발전을 위해 헌신하셨다.

촬영하면서 제작진, 배우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1980년대는 서로 도우며 지냈다. 1990년대부터 한국영화배우협회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영화배우협회 연기분과 회장과 영화배우 복지회장을 역임했다. 여러 배우와 똘똘 뭉쳐 움직였다. 임원진을 맡고 보니 마땅한 사무실이 없어서 기금을 마련했다. CF를 촬영해 수입을 올려 공간을 마련했다. 충무로에 나오면 커피를 마시며 안부를 묻고 교류하는 공간이 있다는 것, 그것이 개인적으로 뿌듯하다.

한국영화배우협회의 안정적 운영에 큰 기여를 하셨지만 아쉬운 부분도 있을 것 같다.

나처럼 나이가 든 영화인들에 대한 관심이 커졌으면 좋겠다. 오늘날과 같은 발전 이면에는 원로 영화인들이 있다. 그들의 경험, 땀, 노고를 바탕으로 한류 콘텐츠가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한때 현장에서 유능한 실력을 발휘한 영화인이었지만, 현재 경제적으로 힘든 분이 계신다. 고령화가 된 원로 영화인들, 그들이 있어서 우리가 문화강국이 된 것이다. 원로 영화인들을 위한 복지 혜택이 절실하다.

그렇다면 원로 영화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제도는 무엇이 있을까.

영화진흥위원회 등에서 특별히 배려를 해주면 좋겠다. 군소영화인들이 제작하고 싶은 영화를 만들면 어떨까. 다들 여전히 영화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 과거 충무로에서 뛰었던 영화인들 중 일부는 희망조차 없이 살고 있다. 예술인들을 돕는 복지정책이 필요하다. 소규모 영화가 많이 나온다면, 원로 영화인들의 수입 창출에 도움이 될 것이다.

과거에는 영화 제작 환경이 매우 열악했다.

나조차도 부상당했을 때 내가 치료비를 내며 출연했다. 이런 희생과 아픔을 딛고 오늘날의 한국영화가 꽃 피운 것이다. 요즘처럼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직접 몸으로 부딪혀 촬영한 노하우가 모여 ‘한국영화의 기술’로 발전했다. 이런 길을 걸어온 원로 영화인들에게 우리 사회가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때다.

녹록지 않은 배우의 길을 걸어왔다. 배우를 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내 깊은 심장이 시켜서 한 일이었다. 배우는 자신의 마음을 비워야 연기를 할 수 있다. 신은 고통을 이겨내는 자에게만 시련을 준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배우는 신에게 선택받은 사람이다. 배우이자 스타로 살아온 나는 ‘모든 면에서 귀감이 되어야 한다’고 되새긴다.

마지막으로 스타포커스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리 원로 영화인들을 비롯해 예술인들을 많이 사랑해 주셨으면 좋겠다. 문화는 한 나라의 자산이다. 특히 한국영화를 많이 사랑해 주시길 바란다.

오현지 email1004@hanmail.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