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제 남편이 살아있다면, 미안하지 않으시겠어요?" 영화 "터널"
"만약 제 남편이 살아있다면, 미안하지 않으시겠어요?" 영화 "터널"
  • 스타포커스
  • 승인 2016.10.24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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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ll_02 <사진제공=쇼박스>

당신은 평소에 차 안에 어떤 물건을 가지고 다니는가. 물? 휴지? 딱히 중요한 물건을 차 안에 두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영화 '터널'을 보고 난다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 충분한 물과, 음식, 그리고 담요까지. 당장 터널에 갇히더라도 한 달은 버틸 수 있을 비상식량을 사놓고 싶은 충동이 영화를 보고 생겼다면 김성훈 감독의 의도가 완벽하게 통했다. '터널'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재난 상황에서 버틴 한 남자의 사연을 단순히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재난 밖에서 벌어지는 일. 오히려 터널 안에 있는 사람보다 더 끔찍한 상황은 밖에서 벌어진다. 과연 우리가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상황은 단지 재난 상황일까. 재난으로 벌어지는 어이없는 현실일까.

가타부타 밑밥을 깔아놓지 않고 '터널'의 상황은 바로 시작된다. 잠시 휴게소에 들러 정수(하정우 분)가 딸의 생일을 맞아 집으로 가는 도중이라는 것만 보여줄 뿐 스피드하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천장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터널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 넣어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관객은 마음의 여유도 없이 하정우와 함께 터널에 갇힌다. 그의 상황이 마치 내가 겪는 상황처럼 사실감을 주기 위해 화면은 주로 하정우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영화의 시작이 뻔한 재난 영화를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이러한 스타일이 낯선 기법은 아니다. '터널'과 비슷한 분위기의 영화 '베리드' 또한 한 남자가 관 속에 갇혀 일어나는 상황부터 사건이 벌어진다. 6피트의 땅속에 철저히 갇힌 상황에서 '터널'의 정수처럼 '베리드'의 폴 콘로이(라이언 레이놀즈 분)도 핸드폰을 통해 구조를 요청한다. 비슷한 조건의 상황에서 다른 점이 있다면 폴 콘로이는 바깥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영화에 표현되지 않았다는 점이고 '터널'은 정수의 상황과 바깥 상황의 비중이 공평하게 영화에 녹아있다는 점이다. 김성훈 감독이 '터널' 안의 상황만 집중하지 않고 바깥 현실 또한 비중 있게 다룬 것은 '베리드'와 하고자 하는 얘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재난보다 오히려 재난을 대처하는 이들의 모습이 더 무섭게 다가온다. "만약 제 남편이 살아있으면, 미안하지 않으시겠어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본 정수의 아내 세현(배두나 분)의 대사가 김성훈 감독이 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막상 정수는 영화에서 자신의 상황을 비극적으로 그려내지 않는다. 정작 슬픈 장면은 정수가 아닌 세현에게서 표현된다. 갑작스러운 남편의 상황에도 세현은 의연하게 대처한다. 그러다 정수를 구할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고 남편의 안위를 포기하는 장면에서 감정의 폭발이 일어난다. 처음부터 격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강인한 아내의 모습을 보여주다 감정을 터뜨리는 장면에서 배두나의 진정한 연기를 감상할 수 있다. 피해자 가족의 아픔을 표현하는 방법을 단지 울기만 하는 단순한 표현을 넘어서 깊이 있는 감정을 선사한다. 영화의 가장 기억되는 장면은 세현이 라디오 방송을 마치고 복도를 걸어 나오는 모습이다. 자신을 쳐다보는 수많은 시선과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복도를 걸어 나오는 세현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영화의 분위기가 무거울 것이라 예상하지 않길 바란다. '터널'의 장점은 영화가 마냥 어둡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센스 넘치는 관객이라면 영화의 줄거리를 보기 전에 포스터의 배우 이름만 봐도 눈치챘을 것이다. 하정우와 오달수 나오는 영화다. 관객이 기대하는 점이 무엇일까. 바로 '재미'다. 물론 사회적인 메시지도 중요하게 담았지만 '터널'의 중요한 포인트는 웃을 수 있는 요소를 영화 곳곳에 숨겨놨다는 점이다. 그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적어도 큰 웃음이 빵빵 터지는 순간들이 한 손가락의 수만큼은 넘어갈 것이라 장담한다.

비록 재난 영화였지만 '터널'은 '베리드'의 결말처럼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답답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 정수의 구출로만 끝이 난 영화는 현실적인 결말에 대한 얘기는 언급하지 않는다. 단지 정수의 욕을 전달한 구조대장 대경(오달수 분)만 경위서를 쓰는 장면으로 마무리할 뿐이다. 보상금 문제나 사후처리 등 복잡한 문제는 잊게 만들고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장치를 내세운다. 영화를 보고 실제 한국에서 일어난 재난이 생각나지만 다시 재조명하려는 의도는 없다는 듯 가볍게 처리했다.

김서해 free70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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