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를 채워 넣어 카오스 같았던 영화 "삼례"
이미지를 채워 넣어 카오스 같았던 영화 "삼례"
  • 스타포커스
  • 승인 2016.10.21 16: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8 <사진제공=(주)인디플러그>

남녀관계를 전면에 내세운다면 최소한 어느 지점에서는 스파크가 일어나야 된다. 이현정 감독은 영화 '삼례'에서 스파크 대신 파장을 선택한다. 거대한 기암절벽을 슬로우 모션으로 보여주다가 두 절벽 사이의 검은 틈을 줌인하는 순간이 그 시점이다. 검고 깊은 공간은 승우(이선호 분)가 꾸는 꿈과 같다. 반복적으로 그의 무의식에 등장하는 검은색 점이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희인(김보라 분)과 함께 그 어두운 곳으로 걸어가는 승우의 뒷모습은 이후에 나오는 새하얀 자작나무숲 장면에서 반복된다. 희인을 등에 업고 뼈마디처럼 앙상한 자작나무들을 스쳐지나가는 승우는 조금씩 그녀에게 동요된다.

이 영화는 시나리오 작가인 승우가 작품구상을 위해 삼례에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곳에서 본토박이인 희인을 만난 승우는 그녀에게 호기심을 가진다. 희인은 솔직하고 꾸밈없는 성격이다. 빵을 먹으며 커피를 마시는 승우를 처음보고 거침없이 "나는 이곳을 떠날 거예요"라는 화법은 일상화 되어있다. 승우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고 가이드를 자처하며 장터로, 닭집으로, 절벽으로, 그를 데리고 다닌다. 승우 역시 그런 그녀가 싫지 않다. 식당에서 열받은 척 즉흥연기를 하며 "내 연기 어때요"라고 묻는 희인에게 승우는 묘한 매력을 느낀다.

'삼례'에는 모호한 맥거핀들이 자주 등장한다. 첫 장면에서 승우가 기차 안에서 읽는 '데미안'이나 모텔 창 밖에서 자신을 보는 남자. 거대한 칼날에 모가지가 두 동강이 나는 닭. 희인의 할머니인 무녀가 보이는 알 수 없는 반응. 미지의 행성이나 태양이 뿜어내는 붉은 에너지 등등. 이 모든 것들은 타지에서 외부인이 접하는 낯선 기운들이다. 승우가 삼례에 내려갔을 때부터 이런 장면들이 본격화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누구나 새로운 곳에 가면 그 지역의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이런 장치들이 맥거핀으로 와닿는 것은 플롯과 긴밀하게 조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지들만 나열할 뿐 그것을 정교하게 엮어서 몰아가는 기동력이 없다. 파편처럼 흩어져서 사라졌다가 잊을만하면 또 다시 나오는 식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분위기가 신비롭다"고 한다. 그리고 희인을 미스터리한 인물로 규정짓는다. 그런데 희인의 경우에는 후반부에 무녀를 통해서 그녀의 전생까지 밝혀진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절벽의 무늬와 서정적인 자작나무 숲을 배경으로 했다고 영화가 신비로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삼례'는 기획의도부터 명확한 작품이다. 이현정 감독은 "삼례는 동학혁명의 중요한 장소지만 알려.지지 않았다"면서, "그곳의 기운과 시간의 결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인터뷰했다. 심지어 희인의 전생이었다는 이소사는 동학혁명에 참여한 인물이다. 그런데 황당한 것은 영화 자체만 놓고 보면 어느 부분에서 동학혁명과 연결되어 있는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동학혁명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현정 감독의 의도가 작품의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기여했을 수 있다. 그러나 관객들은 영화의 배경을 감상하러 상영관을 찾지 않는다. 승우와 희인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더 궁금할 뿐이다. 실제로 이 영화의 결말 또한 둘의 관계를 암시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10 <사진제공=(주)인디플러그>

몇몇 평자들은 승우가 자주 꾸는 꿈을 우주적 이미지라고 한다. 행성이나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검은 공간이 나오면 우주적이라는 수사로 대체가능할까? 진정한 우주적 이미지는 올 해 재개봉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까지 언급하지 않아도 그 예가 많다. '제64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트렌스 멜릭 감독의 '트리 오브 라이프'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영화는 가이아, 생명의 기원이 우주와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이 일상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우주라는 공간을 소환했다. 스탠리 큐브릭 이현정 감독이 거대한 우주를 인간의 원형, 태아로 압축한 엔딩으로 처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나마 '삼례'에서 시도했던 것과 가장 근접했던 작품을 꼽자면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가 있다. 클레어(샤를로뜨 갱스부르 분)와 저스틴(커스틴 던스트 분)자매가 결혼식장에서 겪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변화를 초자연적으로 형상화했다. '삼례'에서 승우의 꿈에 나오는 모호한 공간이나 이미지들은 우주적인 것이 아닌 프로이트의 영역이다.

닭과 데미안의 유명한 구절을 연관시킨 해석들도 있다. 닭집 주인의 무자비한 칼날에 희생되는 닭들처럼 승우와 희인도 자신의 세계를 깨고 나오기 위해 몸부림치는 새라는 것이다. '삼례'가 열린 결말로 마무리된 것은 다양한 해석을 유도하기 위함이 아닐까? 이 영화의 전반적인 톤을 보면 승우가 방송국 오디션장에서 희인을 만났다고 해서 존재가 충만해졌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인간은 모두 고통 받는 존재다. 희인은 자신의 태생으로 인해, 승우는 창작 때문에 항상 고민한 인물들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자신을 억압한 현실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새로운 출구를 찾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냥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사는 것뿐이다. 극렬한 자기부정이나 긍정은 아니란 소리다. '데미안' 한 구절로 두 주인공의 심리를 엮는 것은 무리수다.

어느 순간부터 특정 지역명을 영화 제목으로 짓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이나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 박찬옥 감독의 영화 '파주', 작년에 개봉했던 손승웅 감독의 영화 '영도' 등등.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다. 그리고 대부분 독립영화여서 대중적인 취향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류의 작품들 중에서 '삼례'는 가장 모호한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 작년 전주국제영화제 전주시네마프로젝트 선정작으로 공개된 후에 편집을 완전히 새롭게 해서 개봉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 얽힌 이야기들을 알면 알수록 혼란은 더 가중될 뿐이다. 영화의 배경과 캐릭터의 거리가 이토록 먼 작품도 간만에 만나는 듯하다.

고경태 kkt1343@naver.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