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짠내"나는 중년 아재들의 슬랩스틱 코미디라니, 영화 "올레"
이토록 "짠내"나는 중년 아재들의 슬랩스틱 코미디라니, 영화 "올레"
  • 스타포커스
  • 승인 2016.09.21 15: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04 <사진제공=(주)대명문화공장/리틀빅픽쳐스>

말릭 벤젤룰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서칭 포 슈가맨'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버티고 싶었던 게 아니야. 그냥 살고 싶었을 뿐이지."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버티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벼랑 끝처럼 견고해지는 시기가 있다. 채두병 감독의 영화 '올레'에 나오는 세 남자들의 숨겨진 사연이 그렇다.

이 영화는 10년 동안 고생하다가 하루아침에 희망퇴직을 권고 받는 대기업 과장 중필(신하균 분)과 13년째 사법 고시생인 수탁(박희순 분), 폐암에 걸린 아나운서 은동(오만석 분)이 주인공이다. 이미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고 잘 나가갈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다. 오히려 더 극한에 몰린 그들은 제주도로 가면서 잠시 일상에 쉼표를 찍는다. 부친상을 당한 대학동창 선미(조은숙 분)의 집이 제주도에 있어서 그곳으로 조문을 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염불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있어 보이는 수탁의 민폐 덕에 중필과 은동은 대략난감이다.

03 <사진제공=(주)대명문화공장/리틀빅픽쳐스>

공항에서부터 섹스를 연발하는 그는 제주도 광천수처럼 쌓여있던 감정들을 여과 없이 분출한다. 비싼 외제차를 렌트하는 것을 시작으로 다금바리회를 먹고 난 뒤에는 호텔을 예약하려 하나 이미 빈 방이 없다. 남자 셋이 하와이안 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티격태격하며 호텔 프론트 앞에 서 있는 풍경이란.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중필은 하우스 관리자인 나래(유다인 분)를 볼수록 그녀에게 호감을 가진다. 함께 자전거로 올레길을 달리고, 막걸리도 마시면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설렘을 느낀다.

'올레'는 늦더위를 한방에 날려버리기에 '딱'인 '사이다' 같은 작품이다. 마흔을 바라보는 30대 중년남성들의 감정을 정면에 내세운 점이 강점이다. "우리 나이에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냐"는 중필의 말로 요약할 수 있는 신산한 이들의 일상은 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오프닝에서 한 컷 정도로만 스케치하는 것으로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이런 식상한 이야기가 와 닿는 것은 채두병 감독의 영리한 연출력에 기인한다. 감독은 먼저 충무로 연기파 배우들의 묵직한 아우라를 지웠다. 모처럼 그들에게 위트와 코미디의 색을 입혀 대중성을 극대화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삐에로처럼 우스꽝스러운 것은 아니다. 자주 회자되었던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말처럼 한발 자전거를 타는 광대의 비애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래서 이들이 진정한 친구이기에 말할 수 있었고, 말해야만 했던 진실들은 더 아프게 다가온다.

01 <사진제공=(주)대명문화공장/리틀빅픽쳐스>

가만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한국 중년 남성들을 전면에 배치한 영화들이 얼마나 있었나 반추하게 된다. 임상수 감독의 영화 '바람난 가족'에서 주영작(황정민 분)은 그저 자기 아내인 호청(문소리 분) 보란 듯이 맞바람피우는 '위기의 남자'였을 뿐이다. 한재림 감독의 영화 '우아한 세계'의 강인구(송강호 분)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퇴물조폭을 그만둘 수 없던 비련의 아버지였을 뿐. '올레'는 남자 주인공들을 누군가의 아버지나 아들로만 규정짓지 않는다. 그저 팍팍한 삶이 고달픈,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만만찮은 것이 삶임을 알려주는 남자들을 보여준다.

보스턴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인 하 진의 소설집 '멋진 추락'은 중년남자들의 초상을 다각도로 묘사한 책이다. 하 작가 특유의 유쾌한 문체에 힘입어 비정한 현실을 온 몸으로 맞서는 인물들을 보며 독자는 웃는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한 입 베어 물었을 때처럼. '올레'를 보고 호탕하게 웃지 못하는 것은 충무로 남성감독들에게도 일정부분 책임은 있다. 좀 더 담백하고 발랄하게 풀어낼 수는 없었는지 아쉬움이 남는다.

고경태 kkt1343@naver.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