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기획] 한국영화 秘史를 파헤치다, 시리즈③
[SF+기획] 한국영화 秘史를 파헤치다, 시리즈③
  • 김주영 기자
  • 승인 2021.01.10 09: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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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 도비라

근대 도시의 삶, 그리고 영화의 발전

활동사진으로 시작해 변사(辯士)의 해설로 마무리 되었던 한국영화의 전성시대(~1935’)가 막을 내리면서 한국에는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큰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1935년 이후 대형 스크린은 말 그대로 신세계였다. ‘푸르르르’ 화면 속의 말이 소리를 내고, 사람들의 음성이 스피커를 통해서 나오기 시작했다. 유성영화의 시작, 현대 영화의 시초가 머리를 내민 것이다.

경성촬영소
심청
조선해협
춘향전 포스터

한국 영화가 걸어온 길-발성영화 시대와 군국주의 시대

한국 영화사 속의 최초의 사건을 중심으로 봤을 때, 1903년부터 1945년까지는 한국영화의 1기로 분류된다. 특히 1935년에는 <춘향전>이 첫 발성영화로 제작되었고, 1941년에는 ‘영화 신체제’가 선포되어 조선영화배급회사로 영화의 배급이 일원화 되었다. 

1932 <임자 없는 나룻배>
1934 활동사진 영화 취체규칙, 최초의 상설 촬영소 ‘경성촬영소’ 정식 출범.
1935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 
1937 최남주, 조선영화 주식회사 설립
1938 최초의 영화제 : 1938년 11월 26일 조선일보사에서 주최하고 영화계 전체가 참여한 영화제가 열렸다. 관객의 인기투표를 통해 무성영화, 발성영화 각 베스트 10을 선정했다. 발성영화부는 <심청>(안석영, 1937)이 1위를 차지했다.
1939 조선영화인협회 발족
1940 조선영화령 시행
1941 영화인 등록제 시행
1942 사단법인 조선영화주식회사로 영화사 통폐합
1943 조선해협(박기채) : 사단법인 조선영화주식회사가 조선인 징병제 실시를 ‘기념’하여 제작한 영화. 일본어로 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왼쪽부터 이필우, 임운학, 나운규, 이명우
<춘향전>(향단이와 방자)
<홍길동전 후편>(1936)의 촬영 현장. 이 사진은 이필우의 토키 시스템이 동시녹음 방식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발성영화시대의 개막(1935년)

1935년부터 조선영화계는 <춘향전>을 등에 없고 ‘귀가 열리는 시대’로 발길을 옮겼다. 이로써 영화는 조선 대중문화의 ‘시대적 총아’로 급부상했고, 조선 식민지 시대의 ‘꽃’이 되었다. 

최초의 발성(talkie)영화 <춘향전>, 조선영화의 기세를 떨치다  
1935년 10월 4일, 한국 영화계는 큰 전환기를 맞는다. 경성촬영소가 조선의 첫 발성영화 <춘향전>을 제작해 단성사에서 개봉한 것. <춘향전>의 개봉은 이미 외화 발성영화가 깊이 들어와 있었던 1930년 즈음 전체 영화 중 4%에 불과한 조선영화(일본 영화 69%, 외국 영화 27%)가 기세를 떨칠 수 있는 시발점이 되었다. 

조선 최초의 발성(토키)영화 <춘향전>은 당대 영화기술의 일인자인 이명우(촬영·연출)와 이필우(녹음·현상) 형제가 촬영했다. 특히 이필우는 발성영화의 성공을 불러온 절대적인 인물로 꼽힌다. 조선 최초의 촬영기사인 그는 일본으로 넘어가 앰프와 레코더를 개발했고, 이후 미국의 RCA 시스템을 모방한 독일 녹음기를 일본에서 구입한 후 개조해 <춘향전>의 사운드 녹음을 완성해내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춘향전>의 사운드 재현 수준이 낮고 작품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이었다. 그래도 <춘향전>은 첫 발성영화다. 당대 첫 조선어 발성영화라는 특징으로 관객몰이에 ‘대성공’을 외쳤다.

<춘향전>으로 큰 성공을 거둔 경성촬영소는 이듬해 <홍길동전>(후편, 1936’)에서 동시녹음에 성공했고, 조선영화는 무성영화에서 발성영화(유성영화)로 빠르게 이동했다. 1936년부터 대다수의 영화가 발성으로 제작되었고, 특히 1935년에서 1939년까지 단 4년 만에 총 26편의 발성영화가 제작되었다. 

또 식민지 시기였던 당시, 한 사람이 연출, 촬영, 녹음, 현상, 편집을 모두 소화하는 일이 많았고 기술적 완성도를 맞추기 위해 부족한 기재였던 영화 현상기와 카메라, 조명 등을 자체제작하거나 개조해서 촬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BOX> 영화사
조선영화 주식회사(조영), 고려영화주식회사(고영), 청구영화사, 고려키네마, 한양영화사, 고려영화협회 등이 출범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촬영반 완장
조선영화주식회사 창립작품 <무정>(1939) 시사회 현장

근대도시의 삶과 영화의 산업체제 구축 당대 조선인들의 발성영화에 대한 넘치는 사랑은 ‘영화의 산업 체제’를 등장시키는 요인이 된다. 특히 ‘영화 기술 개혁론’과 ‘기업화론’이 급부상했다.

“‘사이렌’은 삼사천 원으로 가능했지만 ‘토키’는 칠팔천 원으로 두 배가 들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무성영화시기보다 발성영화의 시기에 제작비가 2배가량 뛴 것을 볼 수 있다.

영화제작사, 스튜디오 시대와의 당면(當面)

카메라와 녹음기만 있으면 발성영화 촬영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 동시녹음이 가능한 스튜디오, 현상 인화 등 후반작업 설비 역시 뒷받침되어야 영상과 소리가 맞는 발성영화가 만들어진다. 

발성영화 초기에 등장한 6여개의 제작사(조선영화 주식회사, 고려영화주식회사, 청구영화사, 고려키네마, 한양영화사, 고려영화협회 등)는 발성영화를 더욱 실감나게 재현하기 위해서 현상기, 카메라, 조명 등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기재들을 필요로 했고, 이를 위해 산업 체제를 탄탄히 하려 했다.

특히 제작비가 두 배 이상 상승하면서 산업자본이 필요하고 영화 제작을 기업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는 경성촬영소, 한양영화사, 고려영화협회, 조선영화주식회사 등에 촬영소를 설치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영화는 소음 통제에 유리한 스튜디오에서 주로 제작되었다.

영화 제작의 기업화(企業化)

발성영화의 등장은 영세한 개인 프로덕션에서 좀 더 규모 있는 제작사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하는 한편, 조선 영화인들은 영화산업의 기업화를 위해 대자본의 유입을 갈망했고 만주와 일본으로의 해외수출을 꿈꾸었다. 

1934년 출발한 경성촬영소는 필동에 110여 평의 촬영장, 현상실과 배우 대기실 등을 갖춘 소위 ‘기업형 스튜디오’를 설립했으며, 1937년 청구영화사는 상주의 부호로부터 출자를 받아 다시 법인체로 출범하기도 했다. 또 반도영화제작소, 천일영화사, 극광영화사 등이 발성영화를 기획하며 새로이 설립됐다.

‘조영’과 ‘고영’의 시대

발성영화의 힘을 빌려 영화가 산업으로서의 역할을 모색하던 때, 영화 제작사의 중심에는 조선영화 주식회사(조영)와 고려영화협회(고영)이 있었다.

조선영화 주식회사(조영)는 1937년 7월 자본금 50만 원으로 설립된 식민지 시대에 존립한 촬영소이자 영화제작사다. 일시적으로 흥망을 거듭하던 여타의 제작사와는 달리 상당히 오랫동안 작품을 제작하고 보급하는 역할을 했다. 더구나 조선영화주식회사가 제작한 영화들은 한국 영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조영은 그 세력을 빠른 기세로 넓혀갔다. 동인제로 운영되던 성봉영화원을 조영의 직영 프로덕션으로 흡수하고, 스타 여배우 문예봉과 한은진에게는 100원의 월급을 제공하며 조영의 전속배우로 캐스팅했다. 이윽고 조영은 종업원 수만 80명이 넘는 기업형 제작사로 우뚝 서게 되었다.

고려영화협회(고영)는 1938년 11월 동양극장과 함께 경성촬영소를 인수하여 만들어진 대형 제작사이다. 당시로는 조영과 쌍벽을 이루는 단체로서, 1939년부터 본격적인 제작활동에 나섰다. 그 해 3월 영화제작 뿐 아니라 연극공연도 할 목적으로 극단 고협(高協)을 창립하기도 했다.

이로써 조연영화계는 ‘조영’, ‘고영’을 중심으로 한 영화 제작의 기업화(企業化) 시대를 열었다. 

대중영화의 키워드, ‘선택’과 ‘집중’

인구 40만 명(1935’,서울), 100만 명(1940’, 서울). 급격한 인구의 증가와 신문물의 도입으로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영화의 ‘관객 구성’이 변화하고, 장르가 ‘다양화’ 되었으며, 사회질서의 일부로 순환하는 ‘사회적제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단편으로 구성된 프로그램, 소리라고는 관객의 소음뿐이었던 영화관, 변사의 해설 등 전체적으로 산만하던 극장의 풍경이 점차 변해갔다. 소리가 나는 스크린에 사람들이 ‘집중’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극장(스크린 앞)에서는 ‘조용해야 한다’는 도덕적 사회 통념이 만들어져갔다. 

영화 관객층도 변동을 보였다. 1910년대에는 직공이나 자유노동자들이 영화관객의 주류였던 반면, 1930년대의 영화 관객층은 입장료를 지불할 수 있고, 외화의 서사적 관습에 익숙하고, 변사의 해설 없이도 발성영화의 자막을 독해할 수 있는 ‘근대 교육의 수혜자(학생, 지류계, 숙녀, 기자 등)’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또 영화를 통해 유입된 문물로 인해 카페, 음악당, 영화관이 근대 생활자의 삶에 첨단의 유행이 되었다. 그 많은 문화 중 영화는 그 시대 단 50전으로 고된 하루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었다.

1940년대에 이르러 극장의 총 관람객 수는 1250만 명, 연극 관람객 수는 109만 명으로 영화는 연극의 12배에 가까운 규모까지 성장을 하게 된다.(1940’, 삼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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