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기획] 한국영화 秘史를 파헤치다, 시리즈②
[SF+기획] 한국영화 秘史를 파헤치다, 시리즈②
  • 황아영 기자
  • 승인 2020.11.30 12: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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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영화-한국영화의 전성시대 (1923~1935) 

영화 '장화홍련전'
영화 '청춘의 십자로'

무성영화의 개막
무성영화(無聲映畫)시대는 ‘은막의 시대(Age of the Silver Screen)’라고 불리는데, 이는 대사와 소리가 녹음되지 않은 영화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영화와 녹음된 소리를 합치려는 생각은 영화의 초기부터 있었으나, 동기화라는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 1920년대 후반까지 무성영화들이 많이 나왔다. 또 필요한 대사는 장면 중간 중간에 자막으로 삽입하거나 변사가 설명을 해주는 형식을 취했다.

본격적으로 유성화되는 1928년 전까지가 무성영화의 시대다. 무성영화 시기는 최초의 한국영화의 전성시대로 불린다. 이 시기에 40여 개의 제작사가 활동했고 80여 편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카메라의 성능을 이용한 트릭영화를 고안하게 되어 <달나라 여행>과 같은 작품이 만들어졌으며, 그 다음 인간을 주체로 한 극형식의 영화가 창안되었다. 처음에는 무대에서 일어나는 장면만을 촬영한 것이었으나 차차 영화의 독자적인 표현을 구사하게 되고 내용도 다채로워져서 여러 나라에서 독특한 형태의 작품을 만들게 되었다. 특히 1920년에는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적 사실주의 영화가 출현했다. 

1920년대 이후 경성을 중심으로 대중문화가 형성되면서 무성영화는 더욱 활발한 시기를 맞았다. 이 시기에는 ‘영화’라는 용어가 일반화되었고 나운규, 이규환, 윤백남, 이필우, 전창근, 심훈 등의 영화인들이 대표작을 많이 내놓았다. 

식민지 시기의 조선 영화는 일본인 스태프와 자본이 제작에 참여했는데, 기록에 의하면 1923년에 제작된 <월하의 맹서>(윤백남)가 한국의 최초 극영화라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본래 이 영화는 조선총독부에서 저축을 장려할 목적으로 만든 계몽영화였으나, 최초의 한국 극영화로 인정되는 이유는 조선인이 각본과 감독을 맡고 최초의 조선인 여배우 이월화를 비롯해 조선인 배우와 스태프가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또 판소리 소설을 각색한 영화와 신파극도 다수 제작되었다. 그 중 <춘향전>(1923)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첫 조선 영화로 인정받고 있다. 이는 조선극장 사장인 일본인 하야가와 고슈(早川孤舟)가 결성한 동아문화협회에서 만든 작품으로 조선극장 변사 김조성과 개성 명기(名妓) 한룡이 이도령과 춘향 역을 맡았다. <춘향전>은 1923년 10월 18일 전북 군산좌에서 개봉된 후, 서울에서는 12월 5일 황금좌에서 상영되었다. 

1924년에는 한국 무성영화에 길이 남을 작품이 탄생했다. 바로 <장화홍련전>(1924, 김영환)인데, 이는 <춘향전>의 흥행 성공에 자극을 받아 단성사 경영주 박승필이 단성사 활동사진 촬영부를 조직하고 순수하게 조선인만으로 제작한 영화다. 단성사에서 총 1만 3000여 명의 관객이 동원되었으며, 매일신보 1924년 9월 13일자 신문에 보면 ‘조선에 활동사진이 생긴 이래 초유’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에는 1924년 설립한 최초 영화사 조선키네마주식회사를 비롯해, 1925년 윤백남프로덕션, 고려키네마, 고려영화제작소, 반도키네마, 계림영화협회 등이 설립되어 <해의 비곡>(1924, 왕필렬), <운영전>(1925, 윤백남), <장한몽>(1925, 이경손), <멍텅구리>(1926, 이필우) 등의 작품을 제작했다. 1930년 이후 영화 제작은 급격히 감소했지만, 중앙키네마 <꽃장사>(1930, 안종화), 동양영화사 <승방비곡>(1930, 이구영), X키네마 <큰무덤>(1931, 윤봉춘), 평양서선키네마 <도시의 비가>(1934, 이창근) 등이 발표되었다.

조선 영화가 제작되었지만, 1934년에도 전체 상영 영화 중에서 일본 영화가 69%, 기타 외화가 27%를 차지했고, 조선 영화는 4%에 불과했다.(이 부근에 막대그래프 디자인해서 넣어주세요. 일본 69%/기타 외화 27%/조선 영화 4%) 이 통계에 의하면 당시 조선인의 영화 관람 문화는 여전히 외화을 즐기는 관람 중심의 환경에 있었다. 한편, 1934년 조선극장에서 개봉한 <청춘의 십자로>(1934, 안종화)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한국 영화로, 2008년 발굴되어 대중에 공개되었으며, 변사 연행을 통해 새로운 문화 형식으로 공연되고 있다.

무성영화 변사.
변사 사진.

무성영화의 형식
무성영화시기에 제작된 영화는 거의 ‘판소리 소설의 영화화’ 형식이었다. 세계 초기 영화사에서는 전래의 신화, 민담을 근대적 기계장치인 영화에 결합하는 현상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춘향전>을 비롯해 <심청전>(1925, 이경손), <숙영낭자전>(1928, 이경손) 등이 대표적이며, 특히 <춘향전>은 1970년대까지 새로운 기술이 도입될 때마다 영화화한 최고의 이야깃거리였다.

무성영화 시기의 사운드는 현장 음악과 연주로 대신했으며 영화 해설자의 존재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을 띄었다. 미국에서도 변사는 영화의 전설(前說)을 담당하는 사회자로 1910년경까지 존재했다고 알려져 있다. 일본, 대만, 태국 등 아시아 지역에서는 무성영화 전 시기에 변사가 있었다.

변사(辯士) : 무성영화의 유일한 소리
조선의 변사는 1908년경 일본에서 건너왔다고 추론하고 있다. 일본의 변사(辯士)가 다인극의 양식화된 공연을 수행한데 반해 조선의 변사는 1인극으로 변형되었으며, 경성 극장가를 중심으로 1913년경부터 발성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한 1935년경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개봉관에는 극장마다 3∼4인의 변사가 소속되어 있었으며 도제식으로 운영되었다. 고급 관리 월급이 30∼40원일 때 두 배 이상의 급여를 받는 인기 직종이었고, 허가제로 운영되어 1921년부터 경기도 경찰부가 주관한 등용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장르별로 주요 인물이 구분되어 있었으며 서상호, 김덕경, 최병룡, 성동호, 김조성, 서상필 등이 이름을 떨쳤다.

아시아 지역의 변사는 전통극과 초기 영화 상영 환경에서 기원을 찾는다. 사토 다다오(佐藤忠男)는 분라쿠(文樂)라는 일본의 꼭두각시 놀음에 다유우(太夫)라는 해설자가 있었고 가부키에서 이것을 답습함으로써 변사의 기원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한국에도 판소리 공연과 소설을 읽어 주는 통독 문화가 광범위하게 있었고 이 연장선상에서 변사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외화 중심의 관람 문화에서 높은 문맹률은 변사의 해설이 중요했고, 유성영화 도입 이후에도 사운드 장치가 열악해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토키(takie) 연행이 필요했다. 변사는 능동적 해설자이자 연기자로서 현장의 음악을 조절하고 즉흥적인 연행을 수행했다.

1930년부터 조선에 유성영화가 상영되고 1935년 첫 발성영화 <춘향전>이 제작되면서 변사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지만, 지방의 순회공연에서 변사의 연행은 여전히 중요한 상영 요소로 잔존했다. 해방 후 제작된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1948, 윤대룡)과 유성영화 <독립전야>(1948, 최인규)는 무성영화 시기 변사의 해설과 연기를 거쳐야 영화의 의미가 완성되는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BOX> 식민지 시기 대표 저항적 영화 활동 <카프(KAPF)의 영화운동>
조선의 영화인들은 1927년 발족한 조선영화예술협회를 시작으로, 같은 해 9월 카프의 영화동맹을 조직해 활동했다. 이후 영화제작사 서울키노 등을 결성해 <유랑>(1928, 김유영), <혼가>(1929, 김유영), <암로>(1929, 강호), <지하촌>(1931, 강호), <화륜>(1931, 김유영)을 제작했으나 1934년 일제의 탄압으로 카프가 해산되면서 마감되었다. 일제의 검열로 작품의 완성도가 낮고 상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대중의 호응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춘향전 도비라

근대 도시의 삶, 그리고 영화의 발전

활동사진으로 시작해 변사(辯士)의 해설로 마무리 되었던 한국영화의 전성시대(~1935’)가 막을 내리면서 한국에는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큰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1935년 이후 대형 스크린은 말 그대로 신세계였다. ‘푸르르르’ 화면 속의 말이 소리를 내고, 사람들의 음성이 스피커를 통해서 나오기 시작했다. 유성영화의 시작, 현대 영화의 시초가 머리를 내민 것이다.

경성촬영소
심청
조선해협
춘향전 포스터

한국 영화가 걸어온 길-발성영화 시대와 군국주의 시대

한국 영화사 속의 최초의 사건을 중심으로 봤을 때, 1903년부터 1945년까지는 한국영화의 1기로 분류된다. 특히 1935년에는 <춘향전>이 첫 발성영화로 제작되었고, 1941년에는 ‘영화 신체제’가 선포되어 조선영화배급회사로 영화의 배급이 일원화 되었다. 

1932 <임자 없는 나룻배>
1934 활동사진 영화 취체규칙, 최초의 상설 촬영소 ‘경성촬영소’ 정식 출범.
1935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 
1937 최남주, 조선영화 주식회사 설립
1938 최초의 영화제 : 1938년 11월 26일 조선일보사에서 주최하고 영화계 전체가 참여한 영화제가 열렸다. 관객의 인기투표를 통해 무성영화, 발성영화 각 베스트 10을 선정했다. 발성영화부는 <심청>(안석영, 1937)이 1위를 차지했다.
1939 조선영화인협회 발족
1940 조선영화령 시행
1941 영화인 등록제 시행
1942 사단법인 조선영화주식회사로 영화사 통폐합
1943 조선해협(박기채) : 사단법인 조선영화주식회사가 조선인 징병제 실시를 ‘기념’하여 제작한 영화. 일본어로 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왼쪽부터 이필우, 임운학, 나운규, 이명우
<춘향전>(향단이와 방자)

발성영화시대의 개막(1935년)

1935년부터 조선영화계는 <춘향전>을 등에 없고 ‘귀가 열리는 시대’로 발길을 옮겼다. 이로써 영화는 조선 대중문화의 ‘시대적 총아’로 급부상했고, 조선 식민지 시대의 ‘꽃’이 되었다. 

최초의 발성(talkie)영화 <춘향전>, 조선영화의 기세를 떨치다  
1935년 10월 4일, 한국 영화계는 큰 전환기를 맞는다. 경성촬영소가 조선의 첫 발성영화 <춘향전>을 제작해 단성사에서 개봉한 것. <춘향전>의 개봉은 이미 외화 발성영화가 깊이 들어와 있었던 1930년 즈음 전체 영화 중 4%에 불과한 조선영화(일본 영화 69%, 외국 영화 27%)가 기세를 떨칠 수 있는 시발점이 되었다. 

조선 최초의 발성(토키)영화 <춘향전>은 당대 영화기술의 일인자인 이명우(촬영·연출)와 이필우(녹음·현상) 형제가 촬영했다. 특히 이필우는 발성영화의 성공을 불러온 절대적인 인물로 꼽힌다. 조선 최초의 촬영기사인 그는 일본으로 넘어가 앰프와 레코더를 개발했고, 이후 미국의 RCA 시스템을 모방한 독일 녹음기를 일본에서 구입한 후 개조해 <춘향전>의 사운드 녹음을 완성해내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춘향전>의 사운드 재현 수준이 낮고 작품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이었다. 그래도 <춘향전>은 첫 발성영화다. 당대 첫 조선어 발성영화라는 특징으로 관객몰이에 ‘대성공’을 외쳤다.

<춘향전>으로 큰 성공을 거둔 경성촬영소는 이듬해 <홍길동전>(후편, 1936’)에서 동시녹음에 성공했고, 조선영화는 무성영화에서 발성영화(유성영화)로 빠르게 이동했다. 1936년부터 대다수의 영화가 발성으로 제작되었고, 특히 1935년에서 1939년까지 단 4년 만에 총 26편의 발성영화가 제작되었다. 

또 식민지 시기였던 당시, 한 사람이 연출, 촬영, 녹음, 현상, 편집을 모두 소화하는 일이 많았고 기술적 완성도를 맞추기 위해 부족한 기재였던 영화 현상기와 카메라, 조명 등을 자체제작하거나 개조해서 촬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BOX> 영화사
조선영화 주식회사(조영), 고려영화주식회사(고영), 청구영화사, 고려키네마, 한양영화사, 고려영화협회 등이 출범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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