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기획] 한국영화 秘史를 파헤치다, 시리즈①
[SF+기획] 한국영화 秘史를 파헤치다, 시리즈①
  • 황아영 기자
  • 승인 2020.11.24 11: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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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의 시작, 그리고 기억

바야흐로 천만 영화의 시대. 한국영화역사에 새로운 획을 긋는 영화들이 속속들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한국 영화의 역사 연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속되어왔다. 한국영상자료원에 가면 옛 한국영화 관람과 그 시절의 영상문화를 들여다보기 쉬운 환경이 조성되어있고, 원로 영화인들의 구술 기록뿐 아니라 여러 분야의 아카이빙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며 영화의 역사적 자료에 대한 접근이 점점 더 용이해지고 있다.

한성 전기회사 기계창고.

활동사진 : 근대의 상상 체험 (1895年 ~ 1923年)
구체적인 기록과 자료에 따르면, 1900년대 초부터 조선에 활동사진이 상영되기 시작했다. 1910년대에 외화 프로그램을 상영하면서 명동·충무로 지역 일대와 종로 일대에 극장가가 형성되었고, 활동사진은 근대 생활과 신문물에 익숙한 계층을 중심으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1919년 한국 최초의 키노드라마(신파 연쇄극) <의리적 구토>가 제작되기 전까지는 외국에서 들어온 영화를 감상했다.

활동사진은 영어의 모션픽처(motion picture)를 직역한 말이다. 활동사진은 1985년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Lumière Brothers)가 첫 상영을 시작한 후, 각 국에 촬영기사를 파견해 현지 풍경을 촬영하고 상영하는 방식으로 전파됐다. 특히 아시아에서는 1897년 일본에 처음으로 유입 되었는데, 흥행물로 일반에 공개가 되면서 활동사진이라는 이름으로 명칭이 굳게 되었다. 그 결과 세계 주요 도시에서 영화가 빠르게 공개되었고, 한국에는 1903년 활동사진이 유입되어 지금의 영화로 발전하게 되었다.

1903년도 6월 23일자 <황성신문>에는 ‘동대문의 한성 전기회사 기계창고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10전의 입장료를 받고 단편영화를 상영했었다.’는 광고가 처음으로 실렸다. 영화의 내용은 유럽이나 미국과 서울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상영되는 새로운 구경거리에 매일 저녁 1천여 명의 관객이 몰리는 성황을 이루었다고 알려졌다. 

당시 서울의 인구가 20여만 명이었음을 감안하면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지는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특히 활동사진은 대중에게 근대를 상상하고 그를 대리 체험하는 기능을 했다는 점에서 활동사진이 서울에 본격적인 자본주의 분위기를 조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서울 시민들의 많은 관심으로 말미암아 한성 전기회사 마당은 ‘동대문 활동 사진소’로 불리었으며, 점차 관람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조선의 영화 유입에 대한 기록을 보면 외국인이 상영의 주체였고 영화가 담배회사, 전기회사의 활동을 위한 수단이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영화가 자본주의의 전파와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1895년 뤼미에르 형제의 모습.
뤼미에르 형제의 첫 영화 '시네마토그래프'

극장 : 근대적 의미의 극장가 형성
근대적 의미의 극장이 형성된 것은 1907년이었다. 이 시기에는 '움직이는 사진'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이 급속히 커져가던 시기라고 볼 수 있는데, 일본에는 활동사진이 한국보다 5년 빠르게 유입되었고 경성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수가 급증하면서 그들만의 지역이 형성 됐다. 그리고 근대문물을 들여오는 통로였던 일본인들이 근대적 의미의 극장을 형성하고 유행시킨 것으로 본다.

극장은 복합적으로 사용됐다. 한 공간에서 영화, 창극, 신파연극, 기생의 병창, 유랑극단, 서커스 등 다양한 장르의 연행(演行)이 이루어졌는데, 모든 프로그램은 1주일 단위로 자주 교체되었으며 뉴스, 희극, 서부극, 본 영화 등의 순서로 프로그래밍 되었다. 시간은 약 2∼3시간정도 소요 됐으며, 이 시기의 극장 요금은 극장에 따라 특등석, 일반석, 부인석 등 5등급까지 구분해 손님을 받았다.

조선은 1902년 근대 극장의 시초인 협률사가 왕실 극장으로 개소했으며 동대문 내 활동사진소를 비롯해 벽돌집과 창고 등을 개조한 장소에서 활동사진이 상영됐다. 1907년 경성 거주 일본인의 수가 급증하면서 일본인 지역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근대적 의미의 극장이 형성되었다.

시대별로 나누어보면 1907년 북촌에 설립된 단성사를 시작으로 1910년부터 남촌에 어성좌, 경성좌, 개성좌 등이 들어섰고, 북촌에도 연흥사(1908), 장안사(1908) 등의 극장이 설립되었다. 또 이 시기에는 상설 연예관인 경성고등연예관, 우미관(1912), 대정관(1912), 황금관(1913)이 잇달아 세워졌다. 

1920년까지 경성에서 총 12개 극장이 문을 열었고, 1922년에 조선극장이 개소했다. 이후 지방도시에도 극장이 확산되어 1925년에는 서울 12관, 전국 15관이 번성했다. 조선에 영화 극장이 만들어진지 불과 8년 만에 영화관 메커니즘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활동사진 상영 초기에는 뤼미에르와 멜리에스, 미국 바이타스코프에서 제작한 짧은 필름 중심으로 상영이 이루어졌고, 1910년대 중반 이후에는 그리피드(D. W. Griffith),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의 영화 등 유럽과 미국의 다양한 외화들이 상영되었다.

1926 '농중조'
1926 '장한몽'
키노드라마

연쇄극 : 한국영화의 기점
1919년 연쇄극(kino-drama)이 제작됨으로써 외국 영화를 감상하는 것만이 전부이던 시대에서 생산이 함께 이루어지는 단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키노드라마’로 불리는 연쇄극은 연극과 영화를 결합한 무대극의 일종으로 야외 장면을 필름으로 촬영해 연극 무대가 진행되는 중에 상영하는 방식이다. 

연쇄극은 일본에서 1897년부터 1915년까지 번성했으며 조선에서는 1919년부터 1922년까지 4년간 신파극단에서 제작했다. 김도산의 신극좌가 <의리적 구토>(1919)를 제작한 것을 기점으로 꼽는다. 1918년 극단 ‘세도나이카이’가 황금정에서 <선장의 아내>를 공연한 것이 계기가 되어, 단성사 경영주인 박승필의 자본으로 1000피트(10분) 정도를 한강철교, 장춘단, 노량진, 청량리 등에서 촬영해 연극 중간에 상영했다.

<의리적 구토>는 ‘송산은 간악한 계모 밑에서 재산을 뺏기고 가문이 위기에 처하자 의리의 칼을 빼든다’는 내용이었다. ‘<의리적 구토>가 거둔 예상 밖의 성공’(매일신보, 1919. 10. 19)은 운영 경비를 지탱하지 못하고 해산되던 신파 연극단이 연이어 연쇄극을 촬영하는 계기가 되었다. 임성구의 혁신단, 김도산의 신극좌, 이기세의 문예단, 김소랑의 취성좌 등이 <지기(知己)>(1920), <학생절의>(1920) 등을 제작했다. 연쇄극은 집안의 대립, 애정 관계, 인과응보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유사한 구조와 이야기로 대중의 관심을 오래 끌지 못했고 신파극단의 유행이 지나자 급격히 몰락했다.

연쇄극은 영화로서는 불완전한 형식에도 불구하고 한국 영화의 기점으로 인정되고 있다. 연쇄극의 양식적 특징인 초기의 신파(新派)는 ‘새로운 물결’이라는 뜻으로 전통 연극인 구파(舊派)에 반하는 새로운 극형식을 일컫는다. 사적(私的) 소재를 통해 자유연애와 봉건 철폐를 제기하고 근대 의식을 제기한 것이다. 일본의 신문 연재소설인 <불여귀>, <금색야차>(장한몽) 등이 연쇄극과 무성영화로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끌었지만, 신파극단의 극적 전개 방식과 배우가 조선 무성영화에 대거 진출하고 연쇄극의 소재와 연기 스타일 등이 전승되면서 극복해야 할 낡은 것을 의미하는 기원이 되기도 했다.

조선 영화에서 신파는 무성영화 시기에 <장한몽> (1926), <농중조>(1926) 등의 눈물에 호소하는 작품이 인기를 끌었으나, 1930년대를 거치면서 치정, 살해, 음모 등의 소재와 우연성의 남발, 반복적 구조, 지연된 서사 등의 양식적 특성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하위 장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신파는 근대와 전근대의 가치충돌에서 선택의 딜레마에 처한 대중의 혼란을 반영하는 타율적인 근대의식으로 이해하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故 나운규 감독의 생전 모습.

춘사(春史)나운규 감독
나운규는 1924년 일본인 관리 하의 '조선 키네마사'에 연구생으로 입사하여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 가마꾼으로 출연했다. 그는 이규설 감독의 흑백 무성영화 <농중조>에 출연해 배우로서 명성을 떨쳤다. 이후 1926년에는 무성영화 <아리랑>을 제작함으로써 대한민국 영화계의 선구자로 등장했다. 종로 단성사에서 상영한 이 작품은 대한민국 영화계에 큰 획을 그었다. 이후 영화계의 중심이 되어 많은 작품을 냈으며, 대한민국 영화의 새로운 개혁을 시도했다.
작품으로는 <풍운아>(1926), <들쥐>(1927), <옥녀>(1928) 등을 비롯해 발성영화 <아리랑 3편>(1936), <오몽녀>(1937) 등을 감독했다.

풍운아
1926년 12월에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제3회 작품으로 제작되었다. 
줄거리 : 니코라이박 나운규는 외국에서 돌아와 불우한 친우들을 돕고 살아간다. 친우의 애인을 갑부 주인규가 돈으로 매수해서 데리고 산다. 니코라이박은 아편 밀수단의청부를 받고 거액의 돈을 받아 친우의 애인을 구출하고 또다시 방랑의 길을 떠나간다.

아리랑
1926년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제2회작으로 제작된 나운규 시나리오, 감독의 영화. 한국영화사상 가장 초창기에 제작된 명작으로 나운규 감독의 데뷔작품이다.

금붕어 
1927년 7월에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제2회 작품으로 제작되었다. 
줄거리 : 극중 주인공인 ‘나운규’가 현대문화사에서 모집하는 현상 작품에 금붕어라는 소설로 당선이 된 후 벌어진 가족 이야기를 다룬 영화. 부부 사이에 사소한 오해로인해 가정이 와해됐다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온다는 내용 

들쥐
1927년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제4회 작품으로 제작되었다. 
줄거리 : 남우 윤봉춘의 데뷰작이다. 들쥐라고 불리우는 방랑자들이 포악한 부자를 골탕먹이고 그의 손아귀에 들어갈 뻔한 신일선을 빼돌려 애인 주삼손에게 돌려준다는 내용의 액션물이다.

잘 있거라 
1927년 나운규프로덕션의 창립 제1회 작품으로 제작되었다.
줄거리 : 부호집 양반 이금용은 아내 전옥 몰래 기생 연실을 소실로 맞아 인천에 숨겨놓고 드나든다. 이 사실을 안 건달 나운규는 이금용을 협박하면서 돈을 요구한다. 이금용은 양반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 할 수없이 나운규의 요구 조건을 들어준다. 그러는 동안에 나운규는 연실이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연실은 오래지 않아 병으로 죽게 된다. 그 무덤앞에 나운규는 묘비를 박으면서 통곡한다.

사랑을 찾아서
1928년 나운규프로덕션에서 제작한 나운규 시나리오로 나운규 감독이 감독·제작·주연의 세 가지 역할을 한 영화로 유명하다
줄거리 : 구한말시대에 군의 나팔수로 있었던 금용이 일제 탄압에 못견뎌 북간도, 작은 마을, 두만강을 돌아다니며 일어난 헤프닝을 그린 영화. 영화의 특별한 점은 금용이 동료들의 사기를 높이려고 총에 맞아 죽는 최후까지 나팔을 불다가 죽는다. 그 나팔소리는 이 민족의 일제에 대한 항거의 외침으로 해석되고 있다.

오몽녀 
1937년 경성촬영소에서 제작한 이태준 원작, 나운규 각색. 감독의 토키(유성)영화.
나라를 잃은 한국민의 처지를 오몽녀의 처지에 빗대어 현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다는 영화적 해석이 되면서 그의 대표작 <아리랑>의 작가 정신을 이은 작품으로 평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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