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지푸라기라도' 판에 발을 들인 순간, 휘몰아치는 짜릿한 희비극
[리뷰] '지푸라기라도' 판에 발을 들인 순간, 휘몰아치는 짜릿한 희비극
  • 이수민 기자
  • 승인 2020.02.05 17: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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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앞에서 무너져가는 인간들. 그 처절하고 잔혹하기까지 한 과정을 어떻게 풀어내는가에 따라 영화는 극도의 피로감을, 혹은 극도의 흥미를 이끌 수 있다.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차마 마주하고 싶지 않은 주제를 군더더기 없이 신박한 방식으로 풀어내며 감정소모를 낮췄다. 여기에 풍성하게 충족되는 재미는 덤이다.
 
소네 케이스케 작가의 종명 소설을 영화화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이하 <지푸라기>)은 인생 마지막 기회인 돈 가방을 차지하기 위해 최악의 한탕을 계획하는 평범한 인간들의 범죄극이다.

 

사라진 애인 때문에 빚에 시달리며 한탕을 꿈꾸는 태영(정우성), 아르바이트로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는 중만(배성우), 과거를 지우고 새 인생을 살기 위해 남의 것을 탐하는 연희(전도연), 벼랑 끝에 몰린 그들 앞에 거액의 돈 가방이 나타난다. 여기에 고리대금업자 박사장(정만식), 빚 때문에 가정이 무너진 미란(신현빈), 그를 사랑하는 불법체류자 진태(정가람), 가족의 생계가 최우선인 영선(진경), 기억을 잃고 누구도 믿지 않는 순자(윤여정)까지. 다양하고 평범한 인몰들이 등장하며 하나의 돈 가방을 둘러싼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화는 크게 여섯 개의 챕터로 나뉘어 전개된다. 원작 소설의 독특한 구조를 영화화 하는 과정에서 쉽게 이해를 돕기 위해 차용된 방식으로 보인다. 덕분에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권의 책을 읽는 듯 장마다의 감정 전개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하지만 영화 시작 약 한 시간 지점, 전도연의 등장과 함께 영화의 흐름은 사뭇 달라진다. 초반에 설명됐던 사건들의 시간이 사실은 뒤틀려있음을 알게 되고, 그 이후부터는 사건 하나하나가 퍼즐 조각 맞춰지듯 섬세하고 흥미롭게 자리를 찾아간다. 이 과정이 연출의 중요한 포인트로 작용하는데, 다행히도 그 과정은 상당히 견고하고 깔끔하다. 독특한 구조임에도 흐름을 따라가는데 무리가 없다. 배우들의 호연과 척척 들어맞는 장면들은 관객의 몰입감을 이끌며 마지막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게 된다.

 

다양한 캐릭터의 등장이 자칫 영화를 산만하게 만들 수도 있었지만 이 부분은 배우들의 역량으로 촘촘히 메꿔졌다. 바로 전작과는 완전히 다른 캐릭터, “호구를 잡았다”며 환희를 외치는 어떻게 보면 가장 ‘호구’인 태영 역의 정우성은 완전히 안정감을 찾은 연기력으로 캐릭터의 특징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고리대금업자 박사장 역의 정만식은 생각보다 많은 비중으로 작품 내 굵직한 존재감을 남겼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잔잔하게 묻어가는 듯 보이지만 역시나 중요한 ‘키’를 쥐고 있는 중만 역의 배성우 역시 평범한 우리네 가장의 모습을 입체적이고 현실감 있게 표현했다.

 

흐름의 전환점을 담당하는 전도연의 연기는 <지푸라기>에서 단연 가장 빛난다. 전도연의 등장과 함께 영화는 그를 주축으로 흘러가게 된다. 최고의, 최악의 악역 연기를 펼치는 전도연은 늦은 등장임에도 첫 장면부터 분위기를 압도하며 영화의 전체를 휘어잡는다. 걸출한 배우들 사이에서 정가람과 신현빈의 호연도 든든하게 한몫을 챙긴다.
 
사건의 시간이 딱딱 맞춰지면서 전개가 예측 가능한 수준까지 왔을 때, 영화는 또 한 번의 반전을 심는다.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어쩌면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혹은 충분히 일어날법한 일이라서 영화 도중 종종 ‘내 상황이라면?’이라는 질문을 던져보기도 한다. 차마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상황임에도 자꾸만 지독한 ‘판’ 속에 나를 던져보게 되는 마력까지 갖춘다.

단 사람에 따라 어느 정도의 감정 소모는 불가피해 보인다. 잔인한 정도와 선정성이 등급에 비해 다소 약해 보이기도 하지만 기본 주제의 어둡기와 극 초반 인물들의 적나라한 현실을 마주할 때 피로도가 아주 없지는 않다. 영화는 오는 12일 개봉예정이었지만,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여파로 연기되어 날짜를 조율 중이다. 러닝 타임 108분. 청소년관람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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