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원작 솔직히 모릅니다" 9n년생 여성 기자가 본 뮤지컬 '영웅본색'
[리뷰] "원작 솔직히 모릅니다" 9n년생 여성 기자가 본 뮤지컬 '영웅본색'
  • 이수민
  • 승인 2020.01.08 12: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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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빅픽쳐프러덕션
사진 = 빅픽쳐프러덕션

쌍권총, 담배, 선글라스, 뒷골목 문화···.
원작은 제목과 소재만 익숙했다. 누아르는 따분하고 브로맨스는 신물이 났다. 그러니 의심스러울 수밖에. 과연 90년대 태어난 평범한 한국 여성이 80년대를 장악한 홍콩 누아르를 온전히 즐길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겠다. 커튼콜에서 가장 큰 환호의 목소리는 단연 본인이었다.
    
뮤지컬 <영웅본색>은 홍콩 누아르의 시초이자 정점으로 꼽히는 동명의 영화 1,2편을 각색한 작품이다. 의리와 배신이 충돌하는 홍콩의 뒷골목에서 살아가는 송자호(임태경, 유준상, 민우혁), 송자걸(박영수, 이장우, 한지상), 마크(최대철, 박민성) 세 명의 인물의 서사를 통해 진정한 우정, 가족애와 같은 삶의 본질적인 가치를 담아냈다. 
    
오리지널의 힘일까. 서사는 익숙하고 뻔했지만 그런 만큼 뒤탈 없이 담백했다. 군더더기 없는 이야기 속 시대의 아이콘들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니 전형성에 깊이가 더해졌다. 수많은 남성들의 ‘인생작품’으로 거론 되는 이유를 알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진 = 빅픽쳐프러덕션
사진 = 빅픽쳐프러덕션

원작을 모르는 사람의 흥미는 의외로 스토리가 아닌 연출과 효과로부터 나왔다. 뮤지컬의 특성상 더욱 그러했을 수도 있겠다. 1000여개의 ‘LED 조명판’과 ‘인터렉티브 프로그램’을 통해 쉴 새 없이 변주되는 장면은 그 자체로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마치 하나의 설치미술처럼, 혹은 4D영화를 보는듯한 느낌은 기존 뮤지컬이 가지고 있던 한계를 과감하게 넘어섰다. 역동적인 80년대 홍콩의 배경은 국내에 부는 레트로 열풍과 맞물려 90년생들의 가슴을 움직이기 적합했다.
    
생각보다 속도감 있는 전개에 초반에는 흐름을 잡기위한 피로감도 따랐다. 하지만 반복적인 구성과 쉽게 풀이된 시공간 연출, 1부와 2부 사이 간극을 자연스럽게 메꾸는 작업은 젊은 관람객들(원작을 보지 못한)을 위한 배려로 충분했다. 서사는 어렵지 않게 스며들며 행여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그 자체로 즐길 것이 충분한 게 뮤지컬 공연의 특성이자 매력이다.
       
그럼 스토리 말고 또 무엇을 즐길 수 있을까. 스토리만큼 익숙한 것은 음악이었다. 뮤지컬 <영웅본색>은 배우 장국영의 ‘당년정’, ‘분향미래일자’ 등 히트곡들을 한국 뮤지컬 음악계의 독보적인 존재인 이성준 작곡가의 컬래버레이션으로 다시 탄생시켰다. 익숙한 멜로디에 붙여진 한글 가사와 풍부한 오케스트라가 더해진 다채로운 넘버는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며 중장년층에게 뭉근한 향수를, 젊은층에게는 이색적인 감동을 선사했다.
 

사진 = 빅픽쳐프러덕션
사진 = 빅픽쳐프러덕션

배우들의 열연도 빠질 수 없다. 이미 뮤지컬계 걸출한 실력자인 임태경은 명실상부 극의 중심을 잡는다. 농익은 감정연기와 제 옷 입은 액션, 안정감 있는 열창은 관람객들로부터 가장 큰 박수를 이끌었다. 송자걸 역의 박영수는 임태경과 위태롭고 뭉클한 형제 케미스트리를 선보이며 내공 짙은 연기력으로 몰입을 이끌었다.
       
놀라운 발견은 조연들에게 있었다. 페기 역의 정유지, 호반장 역의 이정수는 뮤지컬 <영웅본색>에서 발견한 보물들이라 해도 손색없다. 고회장의 딸로 신분을 위장하고 접근한 자걸에게 마음을 뺏긴 페기 역의 정유지는 상대적으로 짧은 분량에도 뚜렷한 존재감을 과시하며 풍부한 성량과 수준 높은 연기력을 자랑했다. 남성 누아르 특성상 여성 배우의 등장이 상대적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정유지는 독보적인 존재로서 그 자체로 굵직한 한방을 선사했다.      
    
호반장 역의 이정수 또한 큰 박수갈채를 이끈 배우다. 밀도 있는 연기와 큰 체구에서 나오는 가창은 쾌감을 불러왔으며 개인 넘버 무대에서 표출한 ‘선한 캐릭터’의 폭발적 에너지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안기기도 했다. 

사진 = 빅픽쳐프러덕션
사진 = 빅픽쳐프러덕션

뮤지컬 공연의 주 관객층이 여성들이라는 점을 염두 한다면 <영웅본색>의 뮤지컬화는 과감한 선택처럼 보인다. 뮤지컬계 황금듀오로 불리는 왕용범 연출감독과 이성준 음악감독의 용기 있는 도전은 깔끔하게 먹혔다고 볼 수 있다. 1987년 스크린에서 2020년 무대 위로 오기까지. 33년의 시간만큼 성장한 기술을 무대 위에서 적극 활용했다는 점, 색 짙은 장르의 원작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남녀노소 닿을 수 있게 하는 능력은 이들이 명실상부 콤비라는 것을 증명한다.
    
화려한 영상미의 국내 초연 창작 뮤지컬 <영웅본색>은 오는 3월 22일까지 한전아트센터에서 만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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