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배우 엄태구, 한 겹 벗겨내기
[인터뷰] 배우 엄태구, 한 겹 벗겨내기
  • 박주연 기자
  • 승인 2019.11.09 14: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진 = CGV 아트하우스
사진 = CGV 아트하우스

겉모습만으로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배우 엄태구의 매력을 무심코 지나쳐버릴지도 모른다. 강하고 남성적인 마스크와 강렬하게 내뿜는 에너지 뒤로 순수하고 순박한 민낯을 가진 청년이 있다. 미디어를 통해 자연스럽게 주입된 대중적인 이미지는 잠시 미뤄놓는 게 좋겠다. 선입견을 한 겹 벗겨낸 뒤에야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엄태구의 진짜 매력 속으로.
 

사진 = CGV 아트하우스
사진 = CGV 아트하우스

“병구 같다는 말 오늘만 몇 번째인지…”  배우 엄태구가 쑥스럽게 웃었다. 그의 말 그대로였다. 예의가 밴 느린 음성, 상대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온화한 눈빛. 취재진의 말 한 마디에 “죄송합니다”와 “감사합니다”를 입버릇처럼 내뱉는 엄태구는 영화 <판소리 복서>의 병구를 실제로 마주하는 기분을 들게 했다. 겉모습대로 무서울 줄만 알았는데 큰 오산이었다. 자세히 볼수록 다채로운 매력이 있는 배우, 바로 엄태구의 이야기다. 

 

순수하고 애처롭게, 엄태구 때문에 울 줄이야 

세계 최초 판소리 복싱이라는 소재를 코미디와 함께 버무린 유니크한 영화 <판소리 복서>. 그동안 영화 <잉투기>, <차이나타운>, <밀정>, <택시운전사>, <안시성> 등 작품에서 강렬한 캐릭터로 눈도장을 찍었던 엄태구가 극중 펀치드렁크(뇌세포손상증)를 앓으면서도 복싱이라는 꿈을 향해 내달리는 청년 병구 역을 맡았다. 더벅머리, 어리숙한 몸집과 말투로 무장한 엄태구는 기존의 역할과는 정반대되는 모습으로 반전 매력을 선사했다. 

 

<판소리 복서>의 원안인 단편영화 <뎀프시롤: 참회록>의 팬이었다던 엄태구는 “단편영화를 처음 보고 ‘감독이 천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여러 가지로 부담감이 커서 고민을 했지만 안 하면 후회할 것 같아서 도전해보자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고”고 말했다. 부담을 딛고 촬영한 결과 완성도에 대한 만족도는 100%였다. 엄태구는 “언론시사회 후 다시 한 번 느꼈다. 이 감독은 천재라는 걸.(웃음) 단편에서처럼 기발하게 만들어주신 것 같다. 복싱 영화다보니 체력적으로도 힘들었는데 고생한 보람을 느끼게 되는 완성도였다”라고 말했다.

사진 = CGV 아트하우스
사진 = CGV 아트하우스

캐릭터의 개연성과 현실감을 높이기 위해 촬영 기간을 포함해 무려 6개월간 복싱을 연습했고 당시 실제 복싱 선수들의 동계훈련 수준의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엄태구. 그는 형 엄태화 감독의 <잉투기> 촬영 당시 킥복싱을 배운 경험이 있지만 이토록 본격적으로 연습에 임한 건 처음이라고 말했다. 

“복싱 코치가 일대일로 붙어서 하루에 5시간씩 연습했다. 혹시 실제 선수들이 영화를 보신다면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목표를 높게 잡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해보고자 했다. 판소리 복서가 세계 챔피언에 도전한다는 게 실제로 가능한 일처럼 느끼게 하고 싶었다. 그래야 관객들이 믿어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연습을 하면서도 코치에게 ‘이런 것도 가능할까요?’ 몇 번이나 물어보면서 장면들을 만들어나갔다.”

<판소리 복서> 속 병구의 어눌한 말투는 트레이드마크다. 처음에는 ‘어? 뭐지?’ 싶다가도 이내 귀 기울이게 되는 중독성 넘치는 말투다. 현실에서도 느리고 어리숙한 말투로 임하던 엄태구는 “딱히 어떤 말투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은 안했다”며 “그 순간에 좀 더 진실하게 표현하고자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펀치드렁크 증상 중 하나가 말이 어눌해지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도 “병에 대해 조금이라도 가볍게 접근하려는 걸 방지하려고 했다. 최대한 진중하게 표현하고자 한 거다. 또 민지(혜리) 앞이라 말투가 더 조심스러웠던 것도 있다”고 전했다. 

병구의 열정 넘치는 복서 도전기 속에 알콩달콩 귀엽게 버무려진 민지와의 러브스토리도 <판소리 복서>의 볼거리다. 민지는 병구가 있는 체육관 관원으로 합류해 병구의 곁에서 그의 꿈을 응원해주는 인물. 스크린 속에서도 엄청난 활력과 에너지를 불어넣었던 혜리와의 호흡에 대해 묻자 엄태구는 “딱 화면 그대로였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혜리 씨의 에너지는 정말 타고난 것 같다. 덕분에 웃었고 힘을 냈다. 극중 병구가 느꼈을 법한 부분을 나 역시 느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사진 = CGV 아트하우스
사진 = CGV 아트하우스

엄태구는 <판소리 복서>를 통해 전작에서 선보였던 악역, 선 굵은 캐릭터들의 이미지를 상쇄했다. 실제로 숫기가 없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잘 알려진 엄태구는 “악역들만 보신 분들은 의외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다. ‘생각보다 순하다’고도 말씀해주신다”며 “예전에는 정말 조용했는데 지금은 말이 많아졌다. 인터뷰도 길게 할 수 있게 됐다”며 쑥스럽게 웃었다.

<판소리 복서>를 통해 전작에서는 채 보여주지 못한 새로운 매력을 선보이는 것에 대해 엄태구는 “걱정도 되고 떨린다”며 운을 뗐다. 이어 “연기를 하는 입장이다 보니 떨릴 수밖에 없는데 다행이도 많은 분들이 즐겁게 봐주신 것 같아서 기분이 좋더라. 내게는 병구 같은 면도 있고 다른 캐릭터에서 보였던 부분들도 있다. 여러 가지가 내제된 것 같다. 어떤 반응이 있다는 것 자체가 좋다. 이 반응, 저 반응 내겐 다 즐겁다”고 설레는 모습을 보였다.

사진 = CGV 아트하우스
사진 = CGV 아트하우스

엄태구, 이토록 순수한 열정의 배우 

영화는 잊고 지낸 꿈,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향수를 이야기한다. 비정규직으로서,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살아가는 배우로서도 비슷한 걱정을 할 법도 하다. 엄태구는 “걱정은 매일 한다. 기도를 많이 하는데 나는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며 웃었다.

매일 성경을 읽으며 마음을 다잡거나 새벽기도, 철야예배를 나갈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도 알려진 엄태구. 깊은 신앙심에 대해 운을 떼자 엄태구는 “아직 멀었다”고 단호히 말한다. 그는 “바르게 살고 싶다. 노력하는 중이다. 바르게 사는 게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반성하고 기도하면서 바르게 살려고 노력 한다. 배우가 제 직업이고 연기가 저의 전부지만, 그보다 더 큰 의미로 제 전부는 신앙이다. 배우가 되고 사람들이 조금 알아본다고 저 자체가 바뀌진 않는 것 같다. 일이 없을 땐 집에서 청소를 하거나 산책을 하며 생각을 정리하거나 금요일에는 철야예배를 간다. 제 본질이 바뀌는 걸 조심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사진 = CGV 아트하우스
사진 = CGV 아트하우스

정갈하고 고요하게 흐르는 일상 속에서 요즘 엄태구의 화두는 차기작에 대한 고민이란다. 최근 크랭크인 한 영화 <낙원의 밤>은 박훈정 감독의 차기작으로 일찍이 주목 받았다. 12월 말까지 예정돼 있는 촬영을 어떻게 잘 끝내면 좋을지 고민하느라 바쁘다고. <판소리 복서> 개봉일자를 확정 짓고 나니 연기에 대한 또 다른 고민거리가 생긴 셈이다. 그는 “매 작품이 도전이다. 제가 그나마 잘 할 수 있는 게 연기인 것 같다.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평소 즐기는 취미나 일상도 딱히 없다고 밝힌 엄태구에게 연기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 짐작 가능한 부분이다.

“워낙 말주변도 없고 긴장을 많이 하는 성격이라 현장에서 사람들과 쉽게, 편하게 어울리질 못했다. 그래서 이런 성격이 직업적으로 안 맞는 건가? 라는 생각도 했었다. 연기는 하고 싶은데 일이 없을 때, <판소리 복서> 속 병구 같은 간절함을 가졌던 거 같다. 계속 연기를 할 수 있을까 두려움이 있었고 적성과 안 맞나 의문도 들었다. 지금도 계속 두려움과 걱정이 있지만 연기가 직업이니 매 작품마다 도전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다.”

사진 = CGV 아트하우스
사진 = CGV 아트하우스

바쁘게 달려왔고 앞으로는 더 바쁘게 나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앞으로의 목표에 대해 묻자 엄태구는 ‘진실함’이라고 말했다. 요령 없이 정직한 배우 엄태구에게 딱 어울리는 단어기도 하다.

“불가능하겠지만 최대한 진실하게 연기 하고 싶다. 연기하다가 내가 진짜로 울면 보는 분들도 쉽게 공감이 될 텐데 가짜 눈물을 흘리면 공감하기 어렵지 않겠나. 그런 목표로 임하려고 하는데 쉽지는 않다. 할 줄 아는 게 연기뿐인데 그 마저도 잘 안 되면 힘들어하거나 도와 달라고 기도를 한다. 반면에 연기가 잘 될 땐 보물을 얻은 기분이다. 보물을 가졌을 때의 기쁜 감정들로 한 작품을 다 채우고 싶다. 연기할 때 부담과 압박, 두려움이 있지만 재미도 있다. 내가 계획하지 않은 어떤 순간을 작품을 통해 마주하게 되고 그 순간과 가장 비슷한 나를 찾아내서 상상하고 결합시켜 어떤 캐릭터가 튀어나오는 걸 지켜보는 게 가장 행복하다.” 

사진 = CGV 아트하우스
사진 = CGV 아트하우스

“<판소리 복서>를 통한 악역 탈피요? 아직 탈피할 만큼 많이 한 것 같진 않아요. 아직은 좀 더 하고 싶습니다. <낙원의 밤>도 많이 기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